국회의원 자녀들의 짝사랑 참극

차의원 아들 김의원 딸 권총으로 쏘고 자신은 자살
함께 감옥살이 했던 두 의원, 자녀들 맞선주선

김의원 딸 “유학 다녀와서 결혼하겠다” 사양
하숙집 찾아간 차군, 권총 난사

1949년 1월 13일 밤 10시경 서울시 신촌동 70-47 한 주택가. 갑자기 밤하늘을 가르는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곧바로 비명소리와 함께 주택가 하숙방에서 한 여학생이 피를 흘리며 뛰어 나왔다. 방안에는 한 남학생이 쓰러져 있었다. 남학생은 강진의 제헌의원인 차경모의원의 아들이였다.

피를 흘리며 뛰어나온 여학생은 전북 장수지역 제헌의원인 김봉두의원의 딸이였다. 차의원의 아들(24)은 고려대 3학년에 재학중이였고, 김의원은 딸(23)은 이화여대 음악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남학생은 현장에서 숨졌고, 여학생은 총알이 간신히 급소를 피해가 목숨을 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권총 자살까지 시도한 것일까.

자녀들의 혼기를 걱정했던 양가에서는 두 사람의 혼인말이 오고갔다. 그래서 1948년 11월 중순 두 선남선녀는 아버지들의 권유로 맞선을 보게 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다. 차군은 김양을 만나자 마자 반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김양쪽이였다. 김양은 “나는 양행(洋行)을 하고 나서야 결혼하겠어요”하며 차군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양행이란 요즘말로 외국 유학을 의미한다.

김양을 만난 후 차군마음은 더욱 안달이였다. 당시 사건을 동아일보 1949년 1월 15일자 신문이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데 이때 차군의 심정을 ‘등잔의 심지타듯 타는 연모는 극도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던 중 김양은 학교 가까운 신촌에서 하숙을 하게 됐다. 차군은 김양의 본가에 수차례 찾아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이화여대 음악과 주변도 수십차례 배회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피아노 소리만 들릴 뿐 김양의 모습을 볼수 없었다. 김양은 오리무중이였다.

13일 아침의 일이였다. 차군이 김양의 집에 찾아와 “김양을 단념하겠으니 최후로 한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요”라고 정중히 요청하는 것이였다. 그동안의 일 때문에 걱정이 태산같았던 김양의 부모님도 ‘이제야 문제가 해결될려나 보다’ 하고 그 말을 믿었다. 김봉두 의원 부부는 상대가 동료 국회의원의 아들인지라 조심스럽기만 했다.

김양의 어머니가 차군과 함께 택시를 타고 신촌의 김양 하숙집까지 갔다. 택시가 하숙집에 도착하자 차군은 “단둘이서 이야기 하게 해달라”며 김양의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김양의 어머니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로부터 딱 10분 후. 방안에서 권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군은 우선 김양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다음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김양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다행히 심장을 피해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차군이 사용한 권총은 미국제 소형5발이였다.

당시 사건은 ‘국회의원 자녀들의 짝사랑 참극’이란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차경모 의원도 그 사건으로 큰 슬픔을 겪었다고 한다.

차 의원은 2대 국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8명중 950표로 7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겪으며 재선에 실패했다. 차 의원은 초대 국회의원이라는 영예도 안았지만, 아들을 잃고 감옥살이도 하는 등 곡절이 많은 비운의 정치인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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