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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건]‘강진에서도 북만주 이민을 간다’군동면 10호, 병영면 11호, 작천면 6호 집단이민 출발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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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05  13: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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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만주로 떠난 강진 사람들
이행협씨 가족 만주가다 조치원에서 아이 죽어 ‘탄식’

   
1930년대 후반 북만주로 이민을 갔던 조선인들이 움막집을 짓고 사는 모습이다.<사진=동아일보>
일제강점기 일본의 수탈에 못이긴 조선사람들은 고국을 등지고 만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였다. 흑룡강성의 한 신문은 1926년 7월에 이렇게 보도했다.

‘조선농민이 북만주로 이주하는 원인은 일본의 조선점령이후 일본인이 조선에 물밀 듯이 들어와서 쫒겨나오는 까닭이고, 또 하나는 조선은 농산물이 풍족치 못할 뿐만 아니라 인구가 늘어나 먹을게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1920년대 이주 초기에는 북만주 지역에 풍년이 자주 들어 만주에 가면 잘먹고 잘 살수 있다는 소문이 조선내에 퍼졌다. ‘만주에서 말타고 개장수 할 때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때의 말이다. 조선인들이 물밀 듯이 멀고 먼 북만주로 떠나갔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9일자에는 중국관헌이 조사발표한 자료를 이용해 일본이민에게 밀려서 북만주로 넘어간 조선사람이 6만명에 이른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7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는 북만주 이주민이 연내에 1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적었다. 만주 이주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들어 강진에도 북만주 이민열풍이 불어왔다. 강진에도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와 농토를 확보하면서 강진의 농민들도 점점 살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동아일보 1938년 3월 4일자에는 ‘강진에서도 이민을 간다’는 기사가 나온다.

북만주로 이민을 가는 사람이 30호에 달한다고 했다. 지역별로는 강진읍이 3호, 군동면이 10호, 병영면이 11호, 작천면이 6호로 3월 20일경에 강진읍 농촌진흥주사 차부진씨가 인솔해서 출발하는 이민여정이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이 있어서 북만주로 이민을 가려는 주민들을 이렇게 농촌진흥주사가 인솔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는 강진과 만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병영에서 만주로 무명베를 팔러다녔던 ‘만주장사’ 신순덕(93) 할머니에 따르면 만주를 가기위해서는 강진에서 기차를 탈수 있는 영산포까지 걸어가야 했다. 영산포에서 목탄을 때는 야간열차를 탔다. 다음날 아침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평양행 기차를 갈아탔다. 역시 밤차였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가는 길은 영산포에서 서울가는 것 보다 더 멀고 힘들었다. 평양에서 일본 경찰들이 첫 검문을 했다. 열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려 큰 창고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만주로 상품을 가지고 가는게 금지돼 있었다. 일경이 팔 물건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압수해 갔다.

그래서 무명배를 보자기에 쌓아가거나 돌돌 말아서 가지고 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속옷으로 몸에 몇 번을 휘감고 무명으로 옷을 만들어 해 입었다. 아이에게도 무명옷을 입혔다. 또 아이를 업고 무명으로 칭칭동여 멨다. 그렇게 검문을 통과했다. 평양에서 만주행 기차를 타면 하룻만에 두만강을 넘었다. 만주땅에 도착한 것이였다.

1939년 4월 5일자 동아일보 한 귀퉁이에 충남 조치원발 기사로 아주 조그만 사연이 하나 게제돼 있다. 강진사람 이야기다. 신문은 ‘살길을 찾아 만주로 가다가 도중에서 어린아이를 여의고 오도가도 못하고 애타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남 강진군 이행협(49)씨 부부는 어린아이 3명을 데리고 집단이민단에 끼여 만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행협씨가 1938년 3월 4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사의 이민단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사가 1년뒤 것이다. 아마도 만주이민단은 수시로 있었을 것이다.

이행협씨 일가족이 기차를 탔는데 그중에 두 살짜리 둘째딸 천이가 갑자기 병을 얻었다. 증상이 위독했다. 이행협씨 부부는 천이를 데리고 가까운 역에서 내려야 했다. 그런데 두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고민이였다.

부부는 두 아이를 이민단과 함께 보내기로 하고 자신들과 둘째딸만 데리고 기차에서 내렸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이별이였다. 부부는 위독한 아이를 데리고 조치원 시장동 하숙옥 유명상방이란 곳에서 아이를 치료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틀 후 조치원에서 절명하고 만다. 부부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다. 신문은 ‘두 내외가 오도가도 못하고 객지에서 탄식만 하고 있다고 한다’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부부는 나중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갔을까. 만주에서 두 아이들은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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