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묵어야 것다고 맘 묵으면 미리 공을 들여야제”

선거운동은 재미있지만 당선자만 웃는 굿판

내 지지표 만드려면 5~6번은 찾아가야

낙선자들, 다른사람 미워하지 않아야 아픈병 걸리지 않아...

지난 22일 성전면 오산마을에서 만난 김오동 어르신이 선거운동 경험에 의하면 아무리 무쇠같은 사람도 후보가 5번 이상을 찾아오면 마음을 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선거때가 되면 후보들이 꼭 찾아봐야 할 사람들이 있다. 선거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선거의 달인이다. 자유당 시절을 거쳐 공화당, 신민당, 민정당, 평민당, 민자당 시대까지 그들은 지역 골목골목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요즘에야 선거운동이 후보들끼리 싸우는 형국이지만 예전에는 선거운동원들의 대결이였다. 때문에 그들은 선거때만 되면 후보들 보다 더 바빴다. 선거는 그들에게 희망이요 설레임이었다. 선거때가 되면 집안일은 모두 여자들에게 돌아갔다.

성전면 오산마을 김오동(75) 어르신은 1978년 11대 국회의원 선거때부터 현역이던 황호동 국회의원의 투표소 참관인으로 등록하면서 처음 선거운동에 발을 딛였다.

그의 나이 41세때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깍이 입문이였지만 활약은 대단했다. 고향에서 터를 잡고 살며 주변사람들과 끈끈하게 다져놓은 친화력 덕분에 재선에 도전한 황호동 후보가 성전지역 득표율을 올리는데 상당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깝게도 황후보는 길전식․ 윤재명 후보에게 패해 정치권을 떠났다. 김어르신은 “그때 황후보가 당선만 됐어도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크게 웃었다.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한당 후보였던 영암출신 유재희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 집안 친척뻘 되는 유후보를 도와야 한다는 권유로 영암과 강진을 오가며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

유후보 역시 재선 도전이었다. 그러나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12대때에는 강진의 김식씨와 장흥의 이영권후보가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밀던 후보가 떨어지면 참 미안하지. 후보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선거운동 한 사람은 더 그렇단 말이여. 그때는 다시는 선거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게 또 아니란 말이시”

김오동 어르신이 수집한 국회의원 달력들. 한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때는 현역인 김식 후보의 선거진영에 참여했다. 그동안 주로 야당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지만 김식 후보가 같은 경주 김씨여서 그 규칙을 깼다.
 
김식씨 당선을 위해 성전지역을 누볐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식씨는 평민당의 김영진 후보에게 고배를 마셔 정치판을 접고 말았다. 김 어르신이 밀었던 11, 12, 13대 후보들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떨어질 후보만 골라서 선거운동을 한 것 같어. 다들 인물들이었는디... 선거는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관운이라는 것도 중요하드란 말이시.”

김어르신이 국회의원 선거를 처음 경험한 것은 1950년 2월에 있었던 2대 국회의원 선거때였다. 약관의 41세 변호사 양병일 후보가 현역인 차경모 제헌의원을 누르고 당선된 선거였다. 성전 처인마을에서 양병일 후보가 유세를 했는데 회관앞에 500여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그 사람 참 말잘하든만. 키는 작았는데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아주 똑똑해. 저 사람이 되것다 했는데 진짜 되더라고. 그때 그런생각이 들어. 나는 못배워서 못하지만 잘난 사람 내가 당선시키면 그 재미가 있겠드란 말이여”

3대 선거에는 성전 영풍마을 출신 조덕훈씨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선거였다. 김어르신은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내심 조후보의 당선을 바랬다. 약관 34세의 조후보는 성전지역의 후원으로 5천614표를 얻었으나 당선된 김성호, 양병일 후보에 이어 3위를 하는데 그쳤다.

“다른 후보들은 트럭에 마이크를 설치해서 선거유세를 하는데 아 우리 조후보는 깍대기(두꺼운 종이)를 말아서 연설을 하드란 말이시. 참 안쓰럽기도 하고... ”

옛날에는 금권선거가 판을 쳤다. 선거때가 되면 선거운동원들이 돈을 좀 벌었을 성 싶기도 했다. 중간 배달사고가 많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막걸리 사주며 선거운동 했네. 차비하고 밥값 조차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것지만 나는 돈하고는 먼 사람이었어. 황호동후보 참관인 할 때는 밥값하라며 그때 돈으로 오천원을 주더구만. 지금으로 치면 한 오만원 될려나”

대신 한 후보의 선거운동을 할 때는 겨울 내복을 많이 돌렸다고 슬쩍 말해 주었다.

“내복이 많이 내려왔제. 그게 선거법을 위반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없는 사람들이 따뜻한 내복을 많이 얻어 입었으니 그것으로 좋은일 아니였겠는감”

김어르신은 후보들에게 선거를 해서 당선이 되려면 사람들을 진실되게 만나라고 충고했다. 또 마음을 전혀 열지 않은 사람이 내 지지표가 되도록 하려면 5~6 번은 찾아가라고 권장했다.

오랜 선거운동 경험에 의하면 아무리 무쇠같은 사람도 후보가 5 번 이상을 찾아오면 마음을 열게 된다는게 김어르신의 신조였다.

“내가 지역에서 무엇을 해묵어야 것다고 마음을 묵으면 미리 공을 들여서 사람들이 내마음속으로 들어오게 해야제”

김어르신에게 선거는 선거과정도 중요하지만 선거후가 더 문제였다. 낙선후보들은 상당수 패가망신을 하고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여기에 건강까지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강진에서도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에 출마해 낙선 한 후 건강을 해쳐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도 많았다.

“선거는 딱 한사람만 당선되는 거 아니여. 딱 한사람 빼고는 힘든 일을 겪게 된다는 말이제. 그 충격이 평생간다고 하지 않든가. 아 선거운동원들도 몇 년 동안은 꼼짝 못하는데 후보들이 오죽하것냐고. 그것을 잘 이겨내야 진짜 정치인인디...”

패자들이 선거후 고통을 최소화 하는 방법은 주변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것이였다. 틀림없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다른 후보진영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며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게 결국 마음의 병이되어 자신의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어르신은 후보들에게 절대로 남을 미워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또 당선된 사람이든 떨어진 사람이든 선거가 끝나면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꼭 찾아보라고 권장했다. 찾아가서 고맙다고 손 한 번 잡아주면 모든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김어르신은 요즘에는 열다섯마지기의 농사를 짓고 있다. 젊었을 적 남의 집 살이를 15년을 넘게해서 모은 재산이다. 또 평생 적은 일기도 재산1호다.

김오동 어르신이 20대 초반부터 적었던 일기장에는 강진의 역사적인 기록이 많다.
지난해에는 자신이 젊었을 때 적어놓은 일기 덕분에 친척이 징용보상금을 받기도 했다. 김어르신은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내는게 소원이다.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자료가 있어야  말이 신뢰를 받아요. 일기가 있으니 내 역사도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김어르신은 황호동 후보 참관인 할 때 받았던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당시를 대변하는 기록이었다.

또 7대때(1967) 첫 당선 됐던 윤재명 국회의원의 70년 달력과 72년 달력, 9대때 당선돼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낸 길전식 의원의 달력등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달력은 누런 때가 끼어 있었다. 어릴적 보았던 달력이었다. 73년 달력 한쪽에 그런말이 새겨져 있었다.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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