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제 첫 도입 국회의원 선거
강진 경쟁률 8:1 역대 최고
 

양병일 의원
이승만 하야 내각책임제로 권력구조 변경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총선은 국회 사상 처음으로 상원격인 참의원과 하원격인 민의원으로 이원화된 ‘양원제’가 도입된 가운데 실시했다.

5대 총선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3차 헌법 개정으로 내각책임제로 권력구조가 변경돼 제2공화국을 담당할 정부를 선택하는 선거였다.

당초 1차 개헌(1952년 7월, 발췌개헌)때 양원제가 도입됐으나, 그간 입법조치 미비 등으로 참의원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가 5대 총선을 통해 처음으로 참의원과 민의원을 동시에 선출하게 됐다.

의원정수의 경우 5대 민의원은 233명, 초대 참의원은 58명. 임기는 민의원 4년, 참의원 6년(1부:6년, 2부:3년)이었다.

참의원은 3년마다 의원 정수의 절반을 개선하도록 했다. 또한 참의원은 대선거구제로, 민의원은 소선거구제로 선거를 실시했다.

우리 국회사에서 양원제 국회가 실시됐던 경우는 5대 국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국회는 앞으로 양원제 실시에 대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본회의장 두개를 만들어놓았다.

현재 본회의장은 민의원 본회의장이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사용 중인 또 다른 본회의장은 참의원 본회의장으로 쓰일 수 있도록 마련 된 것.

선거결과, 민주당이 민의원 의석의 3분의 2이상(175석)을 획득했고, 자유당은 단 2석에 불과해 권력무상을 실감하게 했다.

전남의 경우도 마찬가지. 민주당이 민의원 32석 중 통일당 1석을 제외한 31석을 휩쓸었고, 자유당은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강진군은 제헌 국회부터 5대 국회까지는 단독 선거구로, 6대 국회부터는 인근 지역과 한 선거구가 되는 복합선거구로 바뀌었다.

5대 국회는 양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 의원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인준함으로써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벌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칙만을 개정한 4차 개헌을 단행했다.

그러나, 제헌국회부터 시작된 우리의 ‘불운한 정치사’는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반발한 4․19혁명으로 한국정치가 정상궤도에 진입하는 듯했으나,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해 민주주의는 더욱 멀어져갔다. 여우를 피하자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의욕을 갖고 출범한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은, 5․16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역대 국회의원 임기 중 가장 짧은 9개월18일이라는 임기를 남겼다.

민주당 후보 양병일, 김현장, 최권성 후보 다툼... 신구파 대립

선거운동은 자유당 집권 때의 선거처럼 노골적인 관권의 탄압이나 경찰의 개입은 없었다.

그 대신 일부 선거구에서 매수, 매표, 투표함의 소각․파괴 등이 일어났다. 남원과 진도에서는 일부 입후보자와 그 운동원들에 의해 개표 난동, 투표함 소각․파괴 등 부정선거가 자행되기도 했다.

강진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눈에 띄는 투표부정은 없었다.

32명을 뽑는 전남지역 민의원선거에는 모두 156명이 입후보해 4.8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전남에서 8인을 뽑는 참의원선거에는 모두 25명이 도전했다.

강진군 선거구(제19선거구)에서는 민의원선거에 모두 8명이 입후보했다. 이는 2대 총선 때와 같은 경쟁률인데, 역대 총선 중 가장 높은 경쟁률이었다.

자유당 몰락으로 사실상 선거운동 때부터 집권여당이나 다름없었던 민주당은, 신․구파 간 경쟁이 치열했다.

신파 공천 선거구에 구파가 대항후보를 내고, 구파 공천 선거구에 신파가 대항 후보를 공천하는 등 같은 당 후보가 한 선거구에 몇 명씩 되기도 했다.
 
전국 233개 선거구 중 110개 선거구에서 신․구파 간 대항후보를 공천했다. 강진에서도 민주당은 신․구파 간 경쟁을 벌여 민주당 후보가 3명이나 됐다. 

출마자는 김용규(金容圭․48, 사회대중당) ․ 김병국(金炳國․36, 무소속) ․ 김현장(金炫漳․43, 민주당) ․ 양병일(梁炳日․50, 민주당) ․ 정동진(鄭東珍․40, 무소속) ․ 유수현(劉守鉉․44, 무소속) ․ 윤재춘(尹在春․38, 무소속) ․ 최권성(崔權成․37, 민주당)후보 등이다.

선거전은 현역 의원이 없는 가운데 치러졌다. 현역의원인 김향수 의원이 민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참의원 선거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좌초 직전의 자유당은 후보가 없었다.

반면 민주당은 후보가 넘쳐났다. 민주당 신파 공천을 받은 양병일 후보와 구파 공천을 받은 김현장 후보와 최권성 후보, 그리고 강진의 재력가인 무소속 김병국․유수현 후보 등 5파전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민주당 신․구파인 양병일 후보와 김현장 후보, 무소속 유수현 후보의 3파전으로 전개됐다.

양병일 후보는 2대 의원을 지냈고 3대, 4대 총선에 연거푸 출마해 지역에서는 지지도뿐 만아니라 조직력도 탄탄했다.

이에 맞서는 유수현 후보는 정치신인이었지만 노련한 행정관료 출신이었다. 유 후보는 무안군수(8대)로 취임한지 한 달 만에 사표를 쓰고 5대 총선에 뛰어들었다. 30대 중반에 해남군수(5대)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부친(유재의)은 금호그룹 창업자인 박인천 회장이 당시 광주여객(금호고속 전신)을 설립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해주었던 인물.  

김병국 후보 역시 30대 중반의 나이에 출마했지만, 학력과 재력이 뛰어났다. 김 후보의 부친(김정식)은 우리나라 3대 갑부로 유명한 김충식씨의 동생. 김병국 후보는 미국 명문대인 앰허스트대를 졸업했다.
 
김 후보는 총선에 낙선한 후 상경, 오랫동안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남덕우 전 부총리, 이승윤 전 재무장관과 함께 ‘서강학파’로 명성을 떨쳤다.

국내 처음으로 ‘한국소비자연맹’을 발족해 단체를 이끌면서 소비자보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강진읍 동성리에 있는 부친의 생가를 천주교에 기증했다.

선거 결과, 양병일 후보가 유효투표수(4만4천252표)의 25.7%인 1만1천362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유수현 후보는 양병일 후보보다 2천399표가 적은 8천963표를 얻는데 그쳐 국회입성에 실패했다.

3위는 6천816표를 득표한 윤재춘 후보, 4위는 6천687표를 획득한 김현장 후보, 5위는 4천633표를 얻은 김용규 후보가 기록했다. 이밖에 김병국 후보(3천207표)와 정동진 후보(1천348표), 최권성 후보(1천236표)가 뒤를 이었다.


 
양병일 의원 정치적 신념 확고
장관 내정됐으나 입각못해 

1960년 4월 19일 제4대 정.부통령선거 부정에 항의하여 시민과 학생들이 서울시내에서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다.

5대 의원을 지낸 양병일 의원(1910.1 ~ 1962. 9)은 강진읍 남성리 출신이다. 일본 주오대학(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광주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던 양 의원은 한청 광주시단장을 지낸데 이어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을 원내외 때 두 번이나 역임했다. (양 의원에 대한 추가 글은 강진일보 홈페이지를 검색, 2월 7일자 ‘총선으로 본 강진정치사’ 시리즈 기사 참조)

양 의원은 지난 2대 총선 때 첫 금배지에 도전한 이후 3대, 4대, 5대 총선까지 내리 네 번 출마했다. 그는 두 번 당선되고 두 번 낙선, 승률 50%를 기록했다.

양병일 의원은 정치적 신념이 확고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무장경관들을 동원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속에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킬 때도 동료 의원 2명과 함께 찬성기립을 하지 않고 기권할 정도였다.

양 의원은 2공화국의 민주당 정권 때 교통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에 내정됐으나, 최종적으론 입각하지 못했다.

당내 계파활동을 달리했던 완도출신 김선태 의원 등이 양 의원의 입각을 막기 위해 맹렬한 반대공작을 폈기 때문이었다고 당시 신문은 보도했다.

이 신문은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맞붙지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 경선의 ‘앙금’이 입각 저지로 이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소장이 1961년 5월16일 오전 9시께 중앙청 앞에서 이낙선 ․ 박종규 소령 등 부하들과 함께 광장을 행진하는 군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양 의원은 ‘정치거물’로 성장 가능성을 보였었다. 민주당이 신․구파로 나뉘고, 또다시 신풍회, 정안회, 청조회, 중도파, 노장파, 소장파, 합작파 등으로 계파활동이 전개됐다.

양 의원은 1960년 5월초 중도적인 노장층 의원 30여명을 규합해 ‘중도파’를 결성, 10월로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당정의 주류인 장면 총리 등과 주도권 싸움을 예고했었다.

양의원은 ‘중도파’ 명의의 성명을 내고 “장면 총리가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국정운영을 잘못하고 있다”면서 “전면적인 개혁과 정책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총리를 바꿀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양 의원의 정치적 꿈도, 정치적 성장도 멈추고 말았다. 양 의원은 1962년 9월 5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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