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날아 온 편지

군동 영포출신 교민 김추윤씨 본사에 편지
1973년 '갈갈이 사건' 취재 온 최풍작가 안내  

미국의 콜로라도 주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군동 영포가 고향인 올해 60대 후반의 김추윤이란 독자였다. 강진일보 인터넷 홈페이지(Nsori.com)에서 ‘강진갈갈이 사건’ 연재를 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미국에 산지 벌써 30년이 넘었다고 했다. 김추윤 독자는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기사를 계속 보다가 그 과정을 조금 알고 있어서 참고하라’고 편지를 적었다고 썼다.

그러니까, 1973년 12월 중순쯤 되던 날이였다. 가을걷이도 다 끝나고 해서 해가 많이 짧아진 때였다. 그때 김추윤씨는 군동면 예비군중대본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이였다. 아마도 5시 30분 정도가 됐을 것이다. 중대본부 사무실은 추워 난로가 피워진 지서 사무실에서 김동엽이란 순경하고 같이 난로를 쬐고 있었다. 그때 경비전화가 울렸다. 김순경이 전화를 받았다.

장흥법원이였다. mbc 취재진이 갈 것이니 안내를 잘 해달라는 전화라고 했다. 6시가 될 무렵 마침 mbc 깃발을 단 검정색 승용차가 지서 마당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두명이였다. 두 사람은 명함을 한 장씩 건네 주었다. 갈갈이 사건을 극화한 mbc 최풍 작가와 연출자 고무생씨였다.

“아 ~ 그놈의 이미지가 오래도 가고 멀리도 가는구나” 
미국에서도 그 소리, “강진이 고향이요”하면
“아~ 갈갈이사건 났던 강진”
 면장도, 작가도 예상치못했던 파장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시대적 과오일 뿐

미국에 거주중인 군동 영포출신 김추윤 독자가 강진일보에 보내 온 편지, 깨알같은 글씨로 편지지 5섯장 분량을 보내왔다.
최풍작가가 말을 꺼냈다. mbc에서 내년에 새로 법정에서 일어난 일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까하고 법원이 있는 장흥에 왔다가 거기서 일제 강점기 군동에서 일어났던 바라바라사건(일본말로 갈갈이라는 뜻이라고 했음)을 얘기 해주면서 군동에 가보라고 해서 지서까지 오게됐다고 했다. 최풍작가는 그 사건을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방위병 김추윤씨는 사건 내용을 잘 몰랐고, 김동엽 순경 역시 강진사람이 아니여서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김순경이 당시 군동면장을 했던 군동 평리마을의 양면장이란 분을 찾아냈다. 전화를 걸어 당시 사건을 물었더니 양면장이 다행히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6시가 되면서 김순경도 근무교대 시간이 됐고, 방위병도 퇴근시간이 됐다. 네 사람은 나란히 양면장댁으로 갔다.

양면장의 손녀딸 정도쯤 되어 보이는 금릉학교 학생같은 아이가 따뜻한 유자차를 내왔다. 네사람은 화롯가에 둘러 앉았다. 사랑방같은 분위기였다. 역사적인 ‘강진갈갈이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였다. 최풍작가와 고무생 연출가는 장흥에서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사건이 발생한지 30년이 넘었기 때문에 이날 들은 양면장의 증언이 결정적인 자료가 됐을게 분명했다.

양면장은 정담을 나누듯 그 때 그일을 기억나는데로 옛 이야기를 하듯 풀어갔다. 김추윤 방위병과 김순경은 양면장의 말을 그냥 흥미롭게 듣고 있을 뿐이였다. 최풍작가는 자기 명함앞뒤에다 메모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최풍작가가 추가 질문을 했으나 양면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면장이 사건의 모든 줄거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였던 것이다.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일어날 시간이 됐다.

최작가와 고연출자는 언제 서울 오시면 mbc 구경이나 한번 하시라고 인사하면서 강진읍 방면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정말로 그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1974년 봄이 왔다. 같은 영포에 사는 친구가 “우리 면에 화산리라는 마을이 있느냐”고 물었다. 화산리는 사건현장과 가까운 곳이였다. 그런곳이 있지 않느냐고 대답하면서 왜 묻느냐고 했더니 “연속극 드라마에 나온다”고 했다.
 
김추윤씨는 지난번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김추윤씨는 방송을 많이 듣지는 못했다. 본방송을 밤중에 하고 다음날 오전 재방송을 했는데 mbc 수신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명함에 몇자 적더니 거창한 드라마를 만든 작가들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지서 사무실에 들어 갔더니 김순경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무엇을 쓰냐고 물었더니 “‘강진갈갈이 사건 방송’이 나가고 보니 여기 살고 있는 일가들에게 피해도 많고 지역 이미지도 아주 나빠져서 그 것 좀 중단시켜 줄수 없느냐고 상부기관에 첩보형식으로 보고서를 쓴다”고 하면서 입맛을 쩍쩍다셨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그때 양면장을 소개시켜준 일이 이런 파장을 가져올 줄 생각도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방송국이 그런 사정을 헤아려 주기는 커녕 드라마는 갈수록 인기를 얻어가기만 했다.

그후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해자집 후손들이 양면장집에 가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당시 최풍작가와 연출자를 안내했던 김추윤씨는 그 뒤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때 그 방송이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지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였다. 양면장은 물론이였고, 작가였던 최풍씨도 “처음 시도하는 드라마라 반응이 어떨지 우리도 모르겠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작가도 자신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법창야화 10화 정도로 중간에 방영했거나 강진이란 지명을 빼고 나왔으면 파장이 조금 적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항상 가졌다.

김추윤씨는 30년전 미국에 왔지만 지금까지도 드라마의 파장이 엄청나다는 것을 경험한다. 교민들 모임에 가서 고향이 어디냐고 서로 물을 때가 있다. “강진이요”라고 하면 “아 그 갈갈이 사건난 곳이지요”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김추윤씨는 ‘아~ 그놈의 이미지가 오래도 가고 멀리도 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김추윤씨는 일주일 후 <강진일보>에 다시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추신형태였다.

“그때 양면장 댁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갈갈이란 표현이 전혀 없었지요. 그냥 바라바라사건이라는 표현만 나왔습니다. 일본말에 친숙한 세대가 아니여서 그냥 별생각없이 넘어갔지요. 그때 갈갈이란 말을 들었다면 우리가 최풍씨에게 그 표현은 지나치니 절대 삼가 달라고 요구했을 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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