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 저지른 폭력…‘강진= 갈갈이 사건’ 지금도 회자

사건현장과 가까운 군동 화방산 인근 광대바위.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다.
아주 옛날 이야기…  이제 영원한 역사속에 묻어야

강진갈갈이 사건이 방송되자 그 반향이 엄청났다. 전국이 갈갈이사건 열풍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건이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청취율이 60% 이상이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 10사람중 6명 이상이 강진갈갈이 사건을 열광적으로 청취한 것이다. 그 정도면 요즘 TV 오락프로그램이나 인기 연속극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그렇게 심어진게 ‘강진= 갈갈이 사건’이였다. 강진갈갈이 사건이 방송되기전 사람들은 강진이란 지명 자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에야 각종 매체가 발달돼 전국 군단위 지명과 위치를 어느정도 파악하지만 당시는 경상도의 군위군이나 충청도의 괴산군 같은곳은 강진사람들에게 이름도 처음 들어본 것 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강진갈갈이 방송이 대 히트를 치면서 강진이 일약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그때는 청자도 없을 때고 다산 정약용 선생도 모를 때였다. 70년대 후반 부산으로 취직을 나갔던 어느 주민의 경험이다.

“공장에 출근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요. 그냥 이상할거 없이 강진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옆의 한 사람이 아~ 갈갈이 사건 그래요. 그러더니 주변사람들도 피식 웃으며 다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떡거리더군요. 범인이 정말 깨알에 글씨를 쓰는 사람이였냐, 은순이가 그렇게 예뻤느냐하며 별의별 것을 다 물어요. 사람들이 갈갈이 사건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경험은 한두사람이 한게 아니다. 70, 80년대 외지에서 살거나 새로 진출했던 강진사람들이 한결같이 갈갈이 사건에 연류되어야 했다.

서울의 한 주민은 “80년대 초반에 서울에 올라갔는데 강진이 어디있는지는 몰라도 갈갈이 사건은 다 알고 있어요. 많이 화가 났습니다” 서울의 또다른 주민은 “지금도 강진이 어디있는지 모른 사람들이 많다. 해남옆이라고 이야기 하면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나 아주 젊은 사람들도 갈갈이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깜짝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70년대 초반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 사건을 직접 듣지 않은 세대들도 강진갈갈이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 강진사람들은 큰 상처를 입어야 했다.

법창야화의 포탄이 직접적으로 떨어진 곳은 강진에 살고 있던 후손들이였다. 강진읍에서는 사건당사자들의 후손들이 장사를 하거나 혹은 식당을 하며 살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그런 사건에 관계됐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법창야화가 일대 사건이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모아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후손들은 강진에서 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다. 범인이였던 고재웅(가명)의 직계후손은 현재 광주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 방송사건은 방송이 끝난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흐르고 있는 역사다. 그 사건은 1939년의 일이였음으로 장장 7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건이 였다.

강진갈갈이 사건은 이제 강진사람들과 전국민의 기억속에서 떠날때가 됐다. 사건 자체가 과장되게 묘사돼 필요이상으로 강진의 이미지를 망쳤다. 강진갈갈이 사건은 이제 영원한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건을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혀 법창야화 제1화로 방송한 것 자체가 큰 사건일 뿐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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