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군수 자임… 강진발전‘큰 그림’

강진읍중앙로새마을정비사업, 땅부자들 반대로 무산… 가장 큰 아쉬움
강진읍서 반대한 사업 해남읍에서 대환영… 해남읍 발전기틀 마련


1977년 6월 정채균 군수(제일 좌측 안경쓴 사람)가 대구 청자도요지 일대를 방문한 당시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중간)과 고건도지사등을 안내하고 있다.
70· 80년대 강진군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정채균 군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정군수는 1976년 1월~1979년 5월까지 3년 4개월동안 21대 강진군수를 했던 사람이다. 보통 관선군수의 임기가 1년이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세배가 넘는 강진군수로 재직했다.

정채균 군수의 업적을 되돌아 보면 지금 강진군의 큰 그림을 그때 그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청자재현사업이란든가 다산유적지 성역화사업, 영랑생가 복원, 마량면소재지 공유수면매립, 강진읍토지구획정리사업, 강진군청 청사설립등이 그때 이뤄진 것이다.

지금 강진의 큰 모습을 보면 그 때 잡혀진 큰 그림이 지금도 큰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영성 복원 정도가 새로 진행되고 있는 큰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강진의 동서쪽 입구에 있던 영랑동상과 다산동상도 정군수때 세웠다. 3.1운동 기념비도 정군수의 작품이다.

장성이 고향인 정군수는 전남도청 서무과장을 하다가 강진군수로 부임했다. 0세때의 일이였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정군수는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강진에 부임하면서 강진문화의 저력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화군수를 자처하기도 했다.

부임후 곧바로 이용희, 조기정, 차부진, 김현장 선생들과 함께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첫 작품은 78년 2월에 나왔다. 당시 재현을 시작으로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청자의 시대가 열렸다.

마량면 소재지로 가보자. 정군수가 부임하기전 면소재지 구 도로 앞은 모두 바다였다. 이곳의 공유수면 매립이 모두 정군수의 업적이었다. 공유수면이 매립돼 새로운 땅이 들어서면서 마량면소재지의 남쪽으로 훌쩍 넓어졌다.

지금 횟집거리라든가, 부두, 상가들이 있는 곳이 모두 공유수면 매립후 들어선 시설들이다. 정군수는 또 강진읍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완성한 사람이였다. 지금 강진읍시장 주변과 다산로일대, 약수탕 주변등이 모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정비된 지역이다. 그 전에는 무질서하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강진군이 땅을 모두 매입해서 구획을 정리한다음 일반인들에게 매각했다. 덕분에 지금의 바둑판 같은 거리가 그 때 들어섰다.

정군수가 가장 가장 아쉬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강진읍중앙로새마을정비사업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소도읍가꾸기 사업이였다. 전국 읍단위에서 처음으로 정군수가 새마을정비사업을 따왔다. 예산 3억원이 내려왔다. 당시에는 큰 돈이였다.

지금의 강진읍 중앙로를 주변의 일제강점기 판자집을 뜯어내고 넓은 2차선도로를 내는 획기적인 사업이였다. 당시에는 강진읍의 주요도로가 중앙로 뿐이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중앙로에 땅과 건물을 가지고 있는 일부 유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역부족이였다.

사업이 반납됐고 이 사업은 해남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해남읍에 지금 가보면 시내를 관통하는 2차선 도로가 넓게 뚫려 있다. 강진읍의 사업을 가지고 가서 했던 사업이다. 강진읍은 좁은 2차선 도로가 예전 그대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때 강진읍이 새마을정비사업을 했더라면 강진읍이 지금의 해남읍 보다 훨씬 커졌을 것이라는 탄식이 있다. 지금은 그 사업을 하고 싶어도 막대한 사업비 때문에 불가능한 상태다. 강진읍 중앙로는 미래에도 전국의 읍단위 중앙로에서 가장 좁은 도로로 평가받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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