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웅, 위조편지 탄로나자 ‘내가 죽였소’ 결국 자백

1심 사형, 2심도 사형 선고...대구형무소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일제강점기 살인사건, 극작가 최풍씨가 30년만에‘갈갈이 사건’으로 되살려

인기극작가였던 최풍씨
고재웅이 완전범죄를 위해 꾸몄던 사건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그는 일단 소갈찌를 죽이면서 얼굴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누구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DNA 분석과 같은 수사기법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신원파악을 할 수 없었다.

고재웅이 그 다음으로 고안해 낸 것은 소갈찌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민 것이였다. 밤중에 소갈찌 목소리를 내며 은순네를 찾아갔다. 그다음 단계는 소갈찌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것이였다.

사람을 죽인 소갈찌가 살아서 도피행각을 하며 장흥에서 은순네에게 편지를 한 것처럼 꾸몄고, 그 후에는 소갈찌가 밀항을 해서 일본으로 영원히 떠난 것으로 각본을 만들고 있었다.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사람을 시켜 편지를 붙이게 하기도 했다.

경찰은 마지막 패를 던졌다. 일본에 있다는 소갈찌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안에 함정을 만들었다. 소갈찌가 오래전 노름판에서 팔아버린 땅 자료를 확보하고 나서, 그 땅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편지를 보낸 것이다. 땅이 학교부지에 들어갈 것이니 평수와 인감도장을 찍어 보내라는 내용이였다.

진짜 소갈찌라면 ‘그 땅은 진즉 팔았는데 무슨 소리냐’는 답장이 올 것이고, 가짜 소갈찌라면 다른 내용의 편지가 올 터였다.

답장이 왔다. 내용이 그랬다. ‘내가 인감도장을 잃어버렸으니 새로 만들어서 처리하고, 학교부지는 인감도장을 만들어 잘 처리하면 될 것이여...’ 틀림없이 소갈찌가 보낸 편지가 아니였다.

경찰은 또 고재웅의 필적조사를 통해 장흥과 일본등에서 소갈찌의 이름으로 은순네에게 배달된 편지가 고재웅의 필체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경찰은 일본에서 온 편지를 읽고 고재웅이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날 밤 경찰은 고재웅을 체포한다. 고재웅은 일본에서 온 편지내용을 들이밀고, 장흥등에서 글씨와 고재웅의 필적을 대조한 것을 보여주자 의외로 쉽게 고개를 떨구었다. 완전범죄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던 ‘소갈찌 일본밀항’이 탄로난 것을 직감한 것이다. 고재웅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울었다.

그러면서 고재웅은 은순네와 통정한 사실이 발각된 후 소갈찌에게 당한 일을 하나하나 털어놨다. 소갈찌는 은순네의 기둥서방이였던 것이다. 군동의 소문난 노름꾼이자 깡패였던 소갈찌는 노름판에서 수시로 고재웅을 불러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소갈찌를 죽이지 않고서는 고재웅 자신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워쩌거럼 될까요?” 고재웅이 경찰에 물었다. “뭐가”
“지가 사람을 죽였으니 저도 사형을 받을 것 아니것소?”
“음...... 그거야 어디 미리 속단할 수 있겠나. 하지만 자네의 경우는 어느 재판장이든 동정할 거야”
“고람 사형은 면하것소?” “면하지.”

그러나 고재웅은 장흥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에는 고등법원이 경상북도 대구에 있을 때였다. 항소한 고재웅은 대구형무소로 옮겨졌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다. 고재웅은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는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데다, 반성의 기미없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갖가지 술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중형이 불가피하다는게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1941년 고재웅은 일제강점기 대구형무소 사형장에서 20대 후반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후로 오랫 동안 사건은 잊혀졌다. 갈갈이 사건이란 이름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1970년 초 어느날, 강진에 MBC 문화방송의 인기 방송작가 최풍씨가 나타났다. 최풍씨는 요즘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 김수현씨와 함께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방송작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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