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웅·소갈찌·은순이를 엮어 낸 그때 그사건

1973년에 책으로 발행된 '법창야화 강진갈갈이사건' 에 넣어진 삽화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그려졌다.
“노름 판돈 가져와라” 소갈찌 괴롭힘에 살인결심
  일제강점기 만연했던 노름문화가 사건의 본질
  법창야화는 치정관계 부각 국민들 호기심 자극

당시 주민들의 증언과 강진갈갈이사건의 대본을 종합해 보면 ‘강진갈갈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기는 1930년대이고 사건의 무대는 군동면 A마을과 B마을 일대다. A마을에 도박을 좋아하는 고재웅(당시 나이 26세.법창야화에 나오는 가명을 여기서 그대로 사용한다)이란 사람과 B마을에 소갈찌(당시 나이 43세. 역시 법창야화의 가명을 그대로 사용함)란 사람이 살았다.

소갈찌 역시 소문난 노름꾼에 깡패였다. 고재웅은 머리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당시 강진보통학교(현재의 강진중앙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군동의 한 주민은 “재웅이가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아주 잘했고 똑똑했다”며 “집안이 어려워 상급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그 좋은 머리를 노름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웅은 또 필체가 좋았고 세필(細筆), 그러니까 아주 작은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소갈찌는 군동의 유명한 깡패였다. 얼굴이 곰보였는데 하룻네 노름방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을 괴롭혀 밑천을 마련해서 다시 판을 붙이곤 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에는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노름을 많이 할 때였다. 웬만큼 행세한다는 사람치고 노름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시대였다. 강진의 유명한 김충식씨나 차종채씨등이 이때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다.

소갈찌가 사는 마을에 주막이 있었다. 그곳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사는 은순이(당시 31세. 역시 법창야화에 나오는 가명을 사용함)라는 과부가 있었다. 강진읍에서 장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만큼 장사가 잘됐다. 가족이 있던 소갈찌는 은순이를 첩으로 삼고 주막을 수시로 출입했다.

그러다 어느날 고재웅이 역시 은순이를 좋아하게 됐다. 고재웅은 은순이와 몇차례 혼외정사를 가졌는데 소갈찌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갈찌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소갈찌는 노름방에서 돈이 떨어지면 수시로 고재웅을 불러내 돈을 가져오게 했다. 돈이 없다고 하면 강제로 어음을 끊게 해서 다음에 갚게 할 정도였다.

1939년 10월 25일의 일이였다. 소갈찌가 고재웅을 주막으로 불렀다. 고재웅은 소갈찌가 부르는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노름돈이 떨어지면 소갈찌는 항상 고재웅을 불러 돈을 요구했던 것이다.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잔이 몇순배 돌자 거나하게 취한 소갈찌가 입을 뗐다.

“내가 심히 다급하게 됐고만...”
“형님 또 무슨 일인디요?”
“한 닷새 후에 병영쪽에서 큰 판이 벌어지는디 거기 가지고갈 밑천이 없단 말이시” “예?”
“요번에 한번만 자네가 뒤를 봐준다면 이제 다시는 자네헌티 아쉬운소리 안헐테닝께 잉..”
“형님, 나도 이제 돈이 없어라우. 형님이 다 가져가셨잖아요”
“뭐 그라믄 못주겠단 말이여? 야 이자슥아...” 소갈찌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고재웅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기세였다. “니가 이 주막에 먼짓꺼리 하러 다니는지 내가 모를지 아냐...워짜것써 돈을 해 줄래 말래”

고재웅은 소갈찌의 위세에 못이겨 할 수 없이 돈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달았다. 고재웅이 병영에서 돈받을 일이 있는데 판이 열리는날 소갈찌와 함께 가서 돈을 받아 건네 주겠다는 것이였다. 닷세 후인 10월 30일 오후 6시경 고재웅과 소갈찌가 군동에서 고개를 넘어 병영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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