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 / 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출산 남쪽 산자락에 위치하였던 월남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1178~1234년)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정확한 창건 시기는 현재 알 수 없다.

그러나 절 주변에 월남원(月南院)이 있었으며, 북쪽으로 누짓재(黃峙)를 넘어 영암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상 매우 중요한 지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월남사의 왕성하였던 사세는 현재 남아 있는 3층석탑(보물 제298호)의 규모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의 내용에서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 매우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에도 불1구하고 정식적인 학술조사는 1994년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가 전부였다. 이에 그동안 문헌자료와 지표조사로만 알려져 있던 월남사지를 체계적으로 정비·복원하고, 이를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정확한 사역과 성격 등을 파악하고자 먼저 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는 강진군의 의뢰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2011년 12월 30일부터 2012년 2월 15일까지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서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 왕성하였던 사세를 알려주듯 절터의 대부분 지역에서 고려시대 건물지와 그에 따른 부속시설이 넓게 확인되어 당시 많은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시굴조사의 한계로 건물지의 정확한 규모와 구조, 성격 등은 밝힐 수 없었으며, 이는 향후 실시될 발굴조사를 통해 규명하여야 하겠다. 

출토유물은 기와와 도자가 대부분으로 기와류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만 확인되고 있어 건물들이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영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특히, 귀목문(鬼目文) 수막새와 연화문 암막새 등의 존재는 건물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長趙’과 ‘崔日尙’, ‘須彌◯’ 등의 글씨가 쓰여진 명문기와편이 확인되어 건물의 성격과 운영주체, 후원 집단과 탐진 최씨를 비롯한 지역의 유력 성씨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자기류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폭 넓게 확인되고 있으나 고려시대 청자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이중 12~13세기의 완과 대접, 접시, 잔, 병, 향로, 의자, 베개, 도판(陶板) 등이 다른 시기에 비해 출토 수량도 많고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고 있어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도철문(饕uc0餮?) 사각향로와 팔각향로는 매우 존귀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의자와 베개 등도 모두 품질이 우수한 특수 기종으로 상류층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들 의례용과 특수 기종 등을 통해 고려시대 월남사지의 권위와 화려한 청자문화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건물의 벽면을 장식하였던 청자 도판은 출토 사례가 드물며 그 수량도 많지 않은데 월남사에서는 많은 수량이 출토되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청자 도판은 현재 예종 17년(1122) 왕실의 별원(別院)으로 창건된 파주 혜음원지(惠蔭院址; 사적 제464호)과 고종 37년(1245) 당시 무인집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에 창건되었으며 고려대장경의 판각지로 널리 알려진 강화 선원사지(仙源寺址; 사적 제259호)에서만 소량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대 최고 상위층과 연계된 대규모 사찰에서만 확인되는 도판이 월남사에서는 훨씬 많이 출토되고 있어 그 권위가 이들 사찰과 견줄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고려 전시기 고품격의 양질 청자를 생산하였던 강진만의 특징을 함께 반영하는 것으로 강진이 고려청자의 성지(聖地)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중국 송대(宋代)에 제작된 고급의 흑자완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이는 당시 무인정권을 기반으로 한 월남사의 사세와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차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현재도 월남사지 일대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차 생산지임을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조사를 통해 그동안 문헌으로만 알려져 왔던 월남사의 사세(寺勢)와 성격 등을 유구와 유물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 청자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생산지였던 강진의 소비 형태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3층석탑 주변의 군유지만을 대상으로 한 시굴조사였기에 월남사의 전체적인 사역과 건물의 배치 상태, 유물의 성격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향후 사역 전체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연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를 계기로 월출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이 병행되어 강진의 역사와 문화가 더욱 깊어졌으면 한다.

끝으로 역사성과 함께 수려한 자연환경과 귀중한 문화유산 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하는 노력도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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