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시골 촌닭인 내가 난생 처음으로 타지에 올라와 학교에 다닐 때 내가 뭔 말만 하면 사람들은 으레 고향이 어디냐고 묻곤 했다. "강진이 고향인디라우!" 숨길 것도 말 것도 없이 사투리가 몸에 밴 탓이다.

"아하! 강진?"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하는 것으로 보아 강진에 대해서 잘 안다는 투였다. 여기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텐데 뒤이은 말이 내 고향이 강진이란 걸 부끄럽게 했다. "법창야화 제1화에 나왔던 그 강진?"'이게 뭔소리여? 하고많은 자랑거리가 있는디 뭣 땜시 해필('하필'의 비표준어) 법창야화 제1화를 들먹거리는 거여?''강진=법창야화 제1화 사건의 배경이 된 고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다며 '남도답사 1번지'인 강진에 대한 애향심이 발끈했다.

'강진'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던 사실은 결코 자랑거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분이 20여 년 가까이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곳이다. 또한 '강진 청자 도요지'도 널리 알려져 있고,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일부)란 시로 유명한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곳, 뭐 이 정도는 나와야 할 텐데 강진을 얘기하는 열의 아홉은 불명예스럽게 '법창야화 제1화'를 들먹거렸다.

'법창야화 제1화'로 강진이 떴던(?) 70년대 중반의 내 어린 시절, 그 당시엔 지금처럼 칼라 TV는커녕 흑백 TV도 귀했던 시절이라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가 라디오였다.

지금도 그 프로의 시작을 알리는 성우의 낭랑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라디오 실화극장의 법창야화 제1화로 강진을 먹칠한 사건의 발생지인 인근 마을 앞 당산나무 주위에서 혼불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고, 오랜 병상에 누워 계셨던 행란이의 할아버지도 혼불이 나갔다는 둥, 밤이 되면 그 혼불이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누구 입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실제로 본 것처럼 유언비어로 나돌았다.

그 이후론 캄캄한 밤에 집에서 조금 떨어진 화단 모퉁이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 어른들은 어둠이 짙은 밤에 어떻게 화장실에 갈까, 나도 어른이 되면 캄캄할 때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에 갈 수 있을까, 별 쓰잘떼기없는('쓸데없는'의 비표준어) 생각일 수 있었지만 겁이 많은 나로선 큰 고민거리였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였지만, 법창야화를 들은 이후로는 별똥별이 떨어지는지를 관찰하기는커녕 밤하늘에 무수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텃밭 으슥진 곳에서 깜박이던 반딧불에도 간이 콩알만 해졌고,장독대 옆 담장 위에서 야옹! 하며 고양이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을 때 모골이 송연해졌다.이제는 고향에 내려가도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느라 누웠던 평상도 없고, 캄캄한 밤에 화단 모퉁이를 돌아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 시험해볼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 집이 몇 해 전에 소방도로가 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어떻게 변했을까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옛집이며 텃밭이 있던 자리 위로 휑하니 뚫려버린 도로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변해버린 집터를 보게 되면 나의 기억 속에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있어야 할  옛집에 대한 영상마저 지워져버릴 것 같아서이며, 지금은 컴퓨터의 바탕화면과 내 블로그에 사진으로나마 띄워놓고 고향집을 추억하고 있다.

△윗글은 강진출신의 수필가 김미애씨가 지난 2005년 3월 발표한 글입니다.‘강진 갈갈이 사건’과 관련해 향우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여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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