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사건을 1973년 극화한 ‘법창야화’

1973년 겨울 발행된 법창야화 강진갈갈이사건 단행본과 책속의 삽화모습이다. 책은 베스트셀러였다.
대본(책)내용 야화수준… 허구가득
소설로 발행돼 베스트셀러되기도
그게 전국청취자들에게‘진실’로 전달

1940년 5월 23일 <동아일보> 2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강진군 00면 00리 000(26)은 같은 마을 사는 0모(43)의 첩 술장수 000(31)과 수년전부터 간통관계를 맺어 왔는데 그동안 여러차례 채에게 발각되어 돈도 빼앗기고 위세도 당하였다. 그러다가 1939년 10월 30일 오후 6시경 오는 채를 죽이기 위해 뒷산으로 도박을 하러 가자고 꾀어내어 도박을 하다가 돌연 칼로 찔러 목을 베어 죽인 뒤 범행을 감추기 위해 얼굴 가죽을 벗기는 갖은 끔찍한 짓을 한 뒤 사교인 천수교도들이 죽인 것 처럼 증거품을 남겨놓고 영산포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가 1940년 2월 28일 검거된 것이다’

아마도 강진갈갈이 사건과 관련된 공식기록으로는 이 기사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지명을 소개하지 않고, 이름을 가명처리했지만 당시 신문에는 정확한 지명과 이름, 나이등이 실명그대로 소개돼 있다.

아마도 이 기사가 1973년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의 방송’이 있게한 결정적인 자료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술하겠지만, ‘강진갈갈이 사건’을 극화한 최풍(79년 사망)씨는 대본을 당시 사건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후 적었다고 했다.

재판자료나 검찰의 공소장같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대본이 아니였던 것이다.

<강진일보>도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가장 먼저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 당시 사건의 판결문이였다. ‘강진갈갈이’ A씨는 1940년 어느날 대구고등법원에서 1심과 같은 살인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된다. 당시에는 고등법원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지법 산하 1심 판결에 대한 항소는 대구고등법원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대구고등법원측은 물론 대구고검, 국가기록원등에도 사건기록은 없었다. 독립운동 판결문과 같은 특수한 사건 외에 일반 형사사건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폐기한다는게 당국의 설명이였다. 설령 판결문이 존재하더라도 열람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누구도 열람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니까 인기작가 최풍씨는 ‘강진갈갈이 사건’의 대본을 사건이 일어난 30년 후에, 그것도 당시 수사과정을 들었던 사람, 현지주민들의 구전등을 취합해 거대한 법창야화 1화를 집필했던 것이다.

MBC측에는 당시 법창야화1화 대본이 보존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최풍씨가 1974년 12월, 그러니까 법창야화가 그해 4월 시작된 후 6개월만에 쓴 ‘문화방송 연속실화극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자 대본을 소설형식으로 개작해 책으로 펴낸 것이다. 당시에는 이 책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인기작가 최풍씨가 이 사건에 상당한 선입관을 가지고 적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깨알하나에 일곱 글자를 써 넣을수 있는 범인의 재능은 이 범죄 발생 4반세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현지 주민들은 입을 모아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피살자나 살인자나 또 이 끔찍한 사건을 유발케 했던 여인을 가리켜 이구동성으로 잡놈, 잡년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70년대에는 가능했을 필체였을지 모르지만 ‘잡놈, 잡년’하는 것은 지금 입장에서 보면 활자를 이용한 테러에 가까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책(대본) 속에는 사실과 다른 허구성 상황설정이 가득해 법창야화가 과연 야화수준의 드라마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럼 일단 사건 현장으로 가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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