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방후원분은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 상징 ”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에 있는 방산장고봉은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이다.

해남 북일면, 영암 시종면등에서 14기 발견

신전면과 맞닿아 있는 해남군 북일면 일대는 역사의 보고이다. 위치가 해로의 중심지다. 동쪽으로는 일본, 서쪽으로는 중국으로 이어진다. 고대로부터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왕래했을 곳이다.  이곳은 사방의 바닷물이 합쳐지고 흩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도 해산물이 가장 맛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북일면 일대에 고대고분이 집중돼 있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다. 북일면에 전남도지정 고분이 방산리 장고봉 고분, 신월리 방대형고분, 용일리 용운고분, 방산리 독수리봉 고분, 내동리 밭섬고분군등 다섯 개나 된다.

이중에서 단연 관심을 받아 온 것이 방산리 장고봉고분이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봉고분이라고 하고 자라봉고분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학술적 명칭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런 무덤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14기 정도가 발견됐다.

이것들이 한때 학계를 긴장시킨 적이 있다. 전방후원분이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6세기 때 절정에 이르며, 7세기 소멸하기까지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묘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식 묘제가 영산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확인된 것이다. 묘지를 발굴한 결과 안에서는 일본식 토기와 유골이 나왔다.

일본인들이 한때 우리나라에 진출했다는 증거였다. 이는 일본인들이 주장해온 임라일본부설를 뒷받침하는 것이였다. 이 묘제는 또 50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만다. 수수께끼였다. 이에대해 그동한 학계에서는 3가지 설이 제기돼 왔다.

첫째는 백제가 마한을 복속한 것은 3세기 후엽과 4세기 중엽, 6세기 중엽인데 당시 백제에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일부 세력이 일본(규슈)으로 망명했다는 것. 훗날 이들이 일본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다시 귀국해 일본의 묘제문화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백제에서 지방통치를 위해 '채용'한 일본 사람들이 묻힌 곳이 바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또 왜(倭)와 빈번하게 왕래한 이 지역 수장층이 한성백제 몰락 후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역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왜와 자신들이 통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왜의 묘제를 축조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최근 열린 한 학술발표에서 6세기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백제와 일본이 단순한 외교적 협력 관계를 넘어 연합정권 성격의 협력 체제를 구축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들어섰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동아시아고대학회의 학술지인 '동아시아고대학'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논문 '마한 잔여고지 전방후원분의 조성 배경'에서 이 같은 분석을 제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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