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지방자치제 만큼 명암이 뚜렷한 제도가 없다.
중앙에 집중돼 있는 권한을 지역으로 분산시켜 지역민 스스로가 지도자를 뽑게 하고 지역을 경영케 한다는 의미는 분명 역사적 진일보였다. 그러나 지치단체장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은 분명 병폐였고, 선거 때면 재연되는 분열과 갈등의 악순환은 지역을 골병들게 했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지 올해로 20여 년째다. 2012년 오늘, 지방자치제도를 통해 주민들의 권리가 신장됐고, 주민들의 삶이 풍요롭게 됐다고 누가 과연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지방자치제가 예산권과 인사권을 한손에 거머쥔 지방자치단체장의 합법적인 해방구였다고 규정한다면 과연 그 말이 틀린 말이 될 것인가.

주민들은 저 아래 있는 피지배자이고, 그들위에 군림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이야 말로 이 제도의 유일한 시혜자라고 말하면 그게 그렇지 않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지난 세월 강진은 정치적으로 참 암울했다. 군수는 반대파를 멀리했고, 언론을 탄압했다. 강진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분류하면 군수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분류하는 사람과 자신을 반대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군수의 반대파로 분류된 사람들은 철저한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다. 이게 과연 지방자치제도의 참 뜻이였을까.

이런 일이 중앙정부에서 행해졌다면 요즘시대에 민란수준의 반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정치권이 정부와 대통령을 감시하고 수 많은 언론이 눈을 부릅뜨고 청와대와 여의도를 향해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만약 청와대가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한다면, 만약 청와대가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면 광화문 거리가 촛불의 행렬로 메워졌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가장 명확해 진게 있다면 정권이 주민들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하면 엄청난 저항에 직면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예산권과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치단체장들이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지역에는 군에서 나오는 각종 사업에 목줄이 쥐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연맹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사법권력과 밀착되어 동맹체계를 과시했다. 그들은 반대파를 무찌르는 군수의 파수꾼 이였다.

시장 군수들에게 잘못보인 공무원들은 섬으로 쫓겨 갔고, 시장군수들에게 낙인찍힌 건설업자들은 짧게는 4년 길게는 12년까지 공사다운 공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게 과연 지방자치단체의 진정한 의미일까.

지난해 6월에 있었던 강진신문 사태는 지방자치제의 모순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비판적 보도형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군수가 조직적으로 지역 언론을 탄압했다. 여기에 지역 유지들의 역할이 있었고, 권력과 가까운 인사들의 심각한 탈선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비판적 기사를 쓰는 기자로부터 펜을 빼앗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비판적 기자를 지역에서 추방코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과연 서울이나 대도시에서라면 가능한 일이였을까.

<강진일보>의 창간은 그들을 미워하기 위해서도, 그들에게 보복기사를 쓰기위해서도 아니다.
의미는 한가지다. 누구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 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구도 언론을 탄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진의 역사 속에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강진지역 사회가 좀 더 민주적으로 변화하고,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면 <강진일보>의 창간 목적은 크게 실현되는 것이다.

앞으로 3개월 후면 강진에서 새로운 군수가 뽑히게 된다.강진이 새롭게 출발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이번 기회를 통해 지방자치의 올바른 방향, 군수의 역할, 주민들의 권리, 언론의 기능 등이 제대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강진일보>가 작으나마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매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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