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 / 민족문화유산연구원 부원장

강진은 고려시대 도강현과 심진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청자를 생산하였던 대구소와 칠량소는 탐진현 내에 있었다. 특히 대구소는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는 단계부터 그 기술이 유입되어 퇴장하는 시기까지 청자를 생산하고 발전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고려청자 요장(窯場)이다.

강진은 도기를 만들던 전통적인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선진 도자 기술을 받아들여 고려만의 독보적인 비색청자(翡色靑瓷)와 상감청자(象嵌靑瓷)를 완성하였던 곳으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따라서 강진청자와 고려청자는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강진청자의 변천사가 고려청자의 변천사이며, 고려청자의 변천사가 강진청자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진 고려청자 요지의 발굴조사는 200여곳의 가마터 가운데 5곳(14기)밖에 조사되지 않아 그 중요성에 비해 조사 연구가 매우 미흡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진 고려청자 요지의 발굴조사는 사적(제68호 강진 고려청자 요지)으로 지정된 대구면의 경우 용운리 10호(4기)와 계율리 25호(1기), 사당리 41호(1기), 사당리 43호(1기)가 조사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제81호 강진 삼흥리 도요지)로 지정된 칠량면 삼흥리 요지 (7기) 등 일부가 조사되었을 뿐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강진 고려청자 요의 기본적인 구조는 대부분 산기슭 경사면을 파고 축조한 반지하식 단실 등요이다. 봉통부와 번조실을 연결하는 불턱의 경우 초기에는 전통도기요의 기술을 이어받아 없으나 중기가 되면 뚜렷한 불턱이 등장하여 중국의 기술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축요재는 중국과 달리 계속 진흙 또는 진흙과 갑발, 진흙과 돌을 이용하고 있어 대부분 벽돌을 축요재로 사용하는 중국과는 다른 고려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중부지역의 전축요는 중국 월주요의 영향을 받아 축조하였으나 강진은 전통방식을 기반으로 중국 기술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굴뚝 구조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최근 사당리 43호 요지에서 초벌칸이 확인되어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강진지역의 청자 요지는 중부지역에서 확인되는 전축요를 비롯하여 고창 용계리, 해남 진산리 요지 등에 비해서도 소규모인데 삼흥리의 경우 더욱 소형이며 그 구조도 도기요와 유사하여 초기 청자요들이 전통 도기요를 계승하여 축조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도자 요지의 효율적인 보존은 유적이 갖는 본질적인 가치를 존중하면서 요장이 위치한 지형등의 자연 환경과 역사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마련하여야 한다. 또한 주변 마을을 활용한 총체적 정비를 구상하여 사람 중심의 경관을 회복하고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요지의 보존방법은 유구의 노출과 비노출, 현지 보존형과 이전 복원형, 건물의 개방형과 노출형, 지하형과 지상형, 전시형과 비전시형 등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이들 방법들은 각각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

이런 다양한 보존 방법 가운데 유구의 잔존 상태와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하여 선택하고 추진하여야 하겠다. 다만 보존 방법을 수립하면서 온·습도의 조절, 방수와 배수 시설, 유적 현장과 연계되는 전시 등은 반드시 고려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효율적인 관리와 운영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강진지역은 많은 청자요지가 분포하고 있으나 극히 일부만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강진 고려청자요지의 정확한 구조와 계보, 변천 등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현상 보존도 중요하지만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요지의 발굴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요지를 보존하고 활용하여야 하겠다.

이를 통해 대부분 지하에 분포하고 있는 강진 고려청자 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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