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주민들은 그들을 위해 불을 켠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 많았제”
남포주민들은 그들을 위해 불을 켠다

남포마을 주민들이 대보름 전야에 마을의 서쪽 강변에서 천제를 올리고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밤이 되면 강진읍 남포마을 서쪽 강변에는 촛불이 켜진다. 북쪽에  젯상을 차리고, 남쪽으로는 금줄을 치고 100여개의 위패가 세워진다. 위패는 아주 작다. 싱징한 대나무를 쪼개 그 끝에 창호지에 적은 신위란 푯말을 끼워넣는다.

물론 제사의 ‘메인 무대’는 젯상에 차려진 ‘천황상제’ 이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더 많이 끄는 것은 남쪽에 차려진 작은 위패들이다.

이 위패는 바다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영령들을 위한 것이다. 후손들이 있는 영령들은 이곳에 끼지 못한다. 후손도 없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그저 바다에서 살다 바다에서 생명을 다한 넋을 위로하는 위패다.

각각의 위패 앞에는 세가지의 찬이 차려진다. 흰떡과 감태라는 마른 파래, 명태 한조각. 위패 앞에 줄줄이 차려진 음식들의 모습도 신비함이 느껴진다.

남포마을 천제의 제관인 이영식씨는 “아주 오래전 돛단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은 바다에서 사고를 많이 당했다”며 “천황상제께 제사를 올리며 그분들에게도 상을 차려 넋을 위로하는 것은 우리 마을의 수 백년된 전통이다”고 말했다.

마을천제의 내력이 적혀있는 책자
바다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어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작은 위패를 만들고
세가지 음식을 차려서
그들의 영면을 기원

“후손들이 없는 어부들을 위해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우리 마을의 오래된 전통”

남포마을 천제의 역사는 173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남포마을에는 도강 18년 음력 정월에 적은 마을계책이 전해 온다.

도강 18년은 조선시대 말에 해당되는 1838년이다. 마을계책에는 천제를 지내는 방법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돼 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천제의 역사를 마을계책이 쓰여진 도강 18년으로 본다.

그러나 남포마을에서 제사가 올려진 것은 한참 전이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남포마을은 삼국시대부터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반대로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나오는 관문이기도 했다. 또 추자도등 서남해안에서 잡힌 해산물이 남포마을을 통해 육지로 팔려나갔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남포에 대한 기록이 넘쳐난다. 남포의 원래 이름은 남당포였는데 남포는 후풍처였다. 후풍처란 육지에서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바다에 바람이 불면 좋은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렸던 곳이다.

1679년(숙종 5년) 9월 16일 제주 안핵 겸 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제주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러 가던 이증(李增1628-1686)은 10월27일 한양을 떠나 11월 25일 강진에 도착했으나 눈비가 자주내려  열흘 가까이 제주 뱃길이 막혔다.

그의 일행은 군관 2명, 별파진 1명, 화공. 서리 2명, 남자노비 1명, 강진공방 1명, 포수 1명, 문서직1명, 격군 8명등 53명이나 됐다. 이증 일행은 12월 6일 순풍이 불어 배가 남당포에서 출항했다.

남포는 이처럼 제주도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먹고 잠잘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갖춘 곳이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남포와 관련된 수십편의 시를 남겼다. 남포가 차지했던 지리적, 역사적 위치는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바닷가 마을에서 전통적인 제례가 없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역사는 수백년, 아니 수천년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포마을 천제는 독특하다. 다른 어촌마을의 당제나 갯제등이 한 곳에서 상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는 것과 달리 마을 안과 마을 밖 두 곳에서 열린다.

대보름 밤 마을안 회관에는 익힌 음식을 차린다. 반면에 마을 바깥 서쪽에는 작은 제단을 차리고 익히지 않은 음식을 차린다. 생선과 각종 해물이 모두 생 것이다.

제단의 신위는 '천황상제 지신, 지황상제 지신'이라고 한문으로 쓰여져 있고, 상에는 돼지머리와 생선, 조, 무, 미나리등이 생 것으로 올라간다. 이 음식은 마을 주민들의 공동회비로 차려진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