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들었던 강진의 옛 이야기들
그게 우리의 삶이고 역사였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때(12살)인 1958년 여름방학때 극장통 거리에서 선배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좌측부터 손효원(금산양조장), 김강원(사업가), 김유성(외과원장), 그리고 필자이고 앉아 있는 사람이 유근홍(교육장, 화가)이다. 필자가 당시 유근홍 화백을 친형처럼 따라 다녔는데 덕분에 유명한 형들과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렬 화백의 수제자였던 유화백은 훗날 필자의 사촌매형이 됐다. 좌측 금은세공 간판의 아래 건물이 당시 조흥은행이다. 이 건물은 훗날 한고식 선생이 매입해 모란다방을 차리게 된다. 맞은편이 금수장호텔(일제강점기때 쓰루야 호텔)이다. 뒤로 오른쪽 2층 목조건물이 창덕여관이다. 사진 오른쪽으로 당시에 분뇨를 처리했던 똥통이 지나가고 있다. 추억속의 사진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때(12살)인 1958년 여름방학때 극장통 거리에서 선배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좌측부터 손효원(금산양조장), 김강원(사업가), 김유성(외과원장), 그리고 필자이고 앉아 있는 사람이 유근홍(교육장, 화가)이다. 필자가 당시 유근홍 화백을 친형처럼 따라 다녔는데 덕분에 유명한 형들과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렬 화백의 수제자였던 유화백은 훗날 필자의 사촌매형이 됐다. 좌측 금은세공 간판의 아래 건물이 당시 조흥은행이다. 이 건물은 훗날 한고식 선생이 매입해 모란다방을 차리게 된다. 맞은편이 금수장호텔(일제강점기때 쓰루야 호텔)이다. 뒤로 오른쪽 2층 목조건물이 창덕여관이다. 사진 오른쪽으로 당시에 분뇨를 처리했던 똥통이 지나가고 있다. 추억속의 사진이다.

강진의 역사는 강진향토사가들이 최근까지 노심초사(勞心焦思) 연구하여 발표한 강진군지(康津郡誌)와 마을사, 개인의 저작들에 의해 잘 정리되었다고 본다. 필자는 여기에 나오지 않는 강진에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을 채록(採錄)해 보았다.

주로 필자가 반세기 전 역사와 세상이치에 대해서 박식한 독봉(獨峰) 이선웅(李鮮雄, 치안대장)을 비롯한 몇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다. 주로 1970년대 민주화를 갈망하던 인사들이 시국담론의 장(場)으로 강진약국(약사, 황호신)에 모였다.

필자는 여기에서 선배들이 후학들에게 들려준 강진역사이야기의 기억을 모아 어록으로 정리해 보았다. 독봉선생은 강진근현대사에서 누구 못지않게 경륜이 탁월하고, 박식하고 입담이 좋은 분이었다.(필자는 강진사회의 역사성과 특성상 구한말 일제강점기까지를 근대사로, 해방 이후 역사를 현대사로 분류하려고 한다)

송시열(宋時烈)과 원두표(元斗杓)가 강진에서 조우하다.

강진읍 서성리에 있는 영당이라고 불리었던 곳이다. 송시열 선생의 사당이 있던 곳이다.
강진읍 서성리에 있는 영당이라고 불리었던 곳이다. 송시열 선생의 사당이 있던 곳이다.

1689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여 가던 중 배를 타려고 성자포(남강, 남포)에 도착하였다. 그 무렵 폭풍으로 인해 배가 출항하지 못하고 인접한 백련사(만덕사)에 상당기간 머물게 되었다.

이 때 그를 따라온 문생들과 지방 향유들에게 7-8일간 유학을 강론하였다. 이와같은 유서(由緖, historic)를 기리는 뜻으로 남강사(南江詞)가 훗날 남강서원이 되었다. 1804년에 영당(影堂, 祠宇)을 평동으로 옮겼다.

1832년에 사우명(영당)을 남강사로 개칭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중앙초등학교 넘어 배다리 방면으로 가는 평동, 신성지역을 영당(影堂, 祠宇)으로 불렀다. 아! 영당은 여기에서 유래된 지명이었던 것이다.

정적이 준 비산을 마신 우암 송시열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성자포(남포)에서 폭풍을 만나 주막에서 묵고 있을 때였다. 이 때 갑자기 이질배피가 나서 생사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원두표(元斗杓)라는 소론의 중진으로 좌의정을 지낸 거물이 한 주막에 묵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정적(政敵) 관계였다. 한 밤중에 복통이 심해지자 우암은 아들에게 “원대감에게 가서 아버지가 이질배피로 고통한다고 전해라. 반드시 약을 줄 것이다” 우암의 아들이 원두표 대감에게 가서 부친의 청탁을 전달했다.

원두표는 의약에 조예가 있던 인물로서 소지하고 있던 비산(砒酸)이란 약을 종이에 싸주면서 한 양(兩)쭝이니 다 잡수라고 전하게” 우암의 아들은 “대감 무슨 약입니까?” “비산(砒酸)이네” “오줌에다 개서 드리라고 전하게” 비산은 극약이었다.

임금이 사약(賜藥)을 내릴 때, 비산에다 부자(附子)를 섞은 것이 사약이라는 말이 있다. 우암의 아들은 깜짝 놀라서 아버지에게 “이것이 비산이라는데 한 양쭝을 다 잡수시랍니다. 혹시 모르니 절반만 드시지요” 우암은 두 말없이 한 양쭝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비록 정적사이였지만 선비로서 송시열과 원두표는 서로의 인품을 신뢰한 까닭이었다. 얼마되지 않아 복통은 신통하게도 멈춰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도암 향촌출신 유학자인 윤장현(尹漳鉉, 도암중학교교장)과 독봉 이선웅(李鮮雄, 치안대장)에게 필자가 직접 들었다. 윤장현 선생은 국회의원 김영진의 중학교 은사(恩師)였다.    

강진원님 대합자랑

강진만에 서식하는 조개류 중 유명한 것이 대합(大蛤)과 반지락(바지락)이다. 대합은 큰 것이면 청소년의 주먹만 하고 보통은 어린이 주먹만하다. 겉면이 광택이 나고 색깔은 백색에서 흑갈색까지 다양하다.

대합의 육질은 졸깃졸깃하고 국물은 시원하고 담백하다. 1950-60년대 필자가 어려서만 해도 대합은 강진 저재(저자)나 장날 흔히 볼 수 있는 조개였다. 어머니가 저재바구니가 묵신하도록 사들고 오셔, 국도 끓여 먹고 그냥 삶아서도 먹었다.

강진의 골목에는 반지락, 대합껍질이 넘쳐나서 밟고 다닐 지경이었다. 강진의 특산물 중 하나가 대합이었다. 그래서 “강진 원님 대합자랑”이란 말이 회자(膾炙)되었다. 대합은 강진현감이 한양 임금에게 올려보내는 진상품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토록 풍성한 대합이 구강포에 서식했을까? 여기에는 내력(來歷)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조시대 어느 무렵이었던가 강진출신 성명불상(姓名不詳)의 어느 양반이 고흥현감(高興縣監)을 살고 돌아왔다. 이삿짐을 뱃길을 이용해서 운반하던 시절이었다. 현감이면 상당한 규모의 살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직 고흥현감은 고향 강진에 돌아오면서 자신의 가재도구는 거의 챙기지 않았다.

큰배 두  척에다 고흥에서 대합을 가득 싣고 강진에 돌아왔다. 강진만(康津灣)에 들어오면서 대합을 바다에 던져 뿌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종패(種貝)를 뿌린 것이다. 이 후로 강진만 구강포에서 풍성한 양의 대합이 나왔다는 것이다.

강진현감 밥상은 닷냥상, 똥방개 이야기
 
이조시대에 관찰사, 목사, 부사, 군수, 현감이 부임할 때 가족은 본가(本家)에서 생활하고 혼자 관아에 부임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현감의 두 끼 식사는 관아(官衙)의 관주(官廚)에서 차려서 바쳤다. 관주(官廚)는 관청의 부엌공간을 표현한 용어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수령이 먹는 관아 식단(食單)을 이렇게 규정했다. 밥·국 ·김치·장을 기본으로 2종의 고기반찬을 포함한 네 접시의 찬(饌)으로 규정을 두었다. 빈번하게 관아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관주에서 식사가 제공되었다.

이 때 식사를 준비하는 관노를 강진에서는 “비부치”라고 불렀다. 아무튼 강진현에서 한끼 식사로 제공하는 재정은 ‘닷냥’이라고 했다. 그래서 “강진원님밥상 닷냥상”이란 말이 민가에 회자되곤 했던 것이다.

강진현감은 밥맛이 없으면 ‘비부치’를 데려다가 볼기를 쳤다. 현감 체면에 밥맛 타령을 할 수 없었다. 비부치를 다구치므로 좀 더 솜씨를 발휘한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자 함이었다. 

궁중용어로 임금이 누는 똥(便)을 매화(梅花)라고 했다. 임금과 특수신분에게는 특별한 존경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앉아서 똥을 누는 틀을 “매화틀”이라고 했다. 임금이 볼일을 보고나면 내시들이 명주베로 항문을 씻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진현감도 똥을 누고 나면 밑을 닦아주는 관노(官奴)가 있었다. 이 직책을 가리켜 “똥방개”라고 불렀다. 현감이 배탈이 나거나 세균성이질에라도 걸리면 발열, 구토, 복통, 설사 등의 현상이 나온다.

현감이 밤새 변소를 들낙거리면 “똥방개”도 명주수건을 바쳐들고 잠을 못자고 시중을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현감자리만 해도 대단한 자리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하층 신분인 “똥방개”의 고초가 오죽 심했으랴! 

강진 옥(獄)샘
 
필자는 어려서 동성리 고내 옥(獄)샘 부근에서 자랐다. 옥샘은 동성리 강진약국에서 김충식 家로 올라가는 왼편에 있는 우물 이름이다. 이 우물은 펌프샘이 일반화되지 못하고 공동수도가 설비되기 전에는 상당히 많은 주민들이 이 우물을 이용했다.

물론 부잣집에는 자기 마당에 우물을 파놓고 길러서 먹었다. 1950년대만해도 당시에는 샘이 귀했다. 물론 집안에 우물이 있는 집도 있었다. 강진읍내 각 마을에 대표적인 우물이 하나, 둘 큰 공동우물이 있었다.

동성리 고내에는 옥샘이 있었고, 동문안에는 사장나무(당산나무) 아래 동문안샘이 있었다. 탑동에는 영랑생가 올라가는 왼쪽에 샘이 있었다. 서문안은 옛날 강진읍교회에서 서문안으로 넘어가는 모퉁이에 샘이 있었고, 그 아래 서문안 회관쪽에 우물이 있었다. 신성에도 영당 쪽에 우물이 있었고, 평동에도 큰 우물이 있었다.

필자의 기억에 가장 크고 수량(水量)이 풍부하고 큰 우물은 동문안 샘이었다. 옥(獄)샘은 강진극장 앞에서부터 삼세의원 골목 사람들, 강진약국 뒤 마을 사람들까지 100여호 이상의 세대가 이 우물을 이용했다. 필자도 어려서 옥샘에서 “타르박”으로 지하 20m 깊이의 우물을 퍼올렸다. 

아뭏튼 왜 샘 이름이 옥(獄)샘인가? 부근에 감옥(監獄)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갇혀있던 죄수(罪囚)들이 나와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는 것이다. 그 감옥터가 현재 동성리 아름다운교회가 들어선 자리이다. 필자가 어려서 그 곳은 고치판매(누에고치수매소)였다.

강진사람과 장흥사람의 차이
 
해방 직후 장흥에서 강진-장흥간 친선 연식정구대회가 열렸다. 경기 도중에 심판의 판정으로 인해 시비가 붙게 되었다. 정구시합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는 시비꺼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양편의 주장이 엇갈려 합의가 안되고 점점 싸움의 기세가 고조되었다.

이 때 강진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여어 장흥놈들! 3·1 만세운동 때 만세 한 번도 못부른 놈들이  뭣났다고 큰 소리여!” 고함을 질렀다. 이 때 장흥사람들이 갑자기 기(氣)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떳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당시 연식정구선수로 직접 참가했던 독봉(獨峰) 이선웅(李鮮雄, 치안대장)의 전언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3·1 만세운동 당시 장흥에는 검찰청(검사국 지국)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민족운동이 더 감시를 받지 않았겠는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장흥원로 강수의(姜守義, 장흥문화원장)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흥사람 입은 강진 남포 처녀 ○○만도 못해”라는 말이 전부터 장흥사람들의 입에서도 자조적(自嘲的)으로 회자되곤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포처녀는 강진 3·1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민족의식을 잃지않고 투쟁했던 박영옥을 지칭한 것임이 자명하다. 박영옥은 결국 대구복심법원에까지 가서 재판을 받았다.

학교마다 봉안전(奉安殿)이 있었다

필자가 강진중앙초등학교(48회, 1953년 입학)에 다닐 때 남쪽에 초가(草家)집 가교사(假校舍) 두 동이 있었다. 필자는 중앙초등학교 시절 1학년 때는 동편 신관에서, 2, 3학년 때는 남편 초가가교사에서 공부했다.

4학년 때는 현재 농협 앞 구 남초등학교(경찰서 사찰계, 분교, 교육청, 도립병원)교사에서 공부했다. 5학년 때는 강진중앙초 본관 서편(교장실, 교무실을 기준으로)에서, 6학년 때는 본관 동편에서 공부했다. 중앙초 남편 초가가교사 앞에 탑 모양의 훼손된 시멘트 탑기념물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천황(日本天皇) 부부(夫婦)의 사진과 천황어록 두루마리, 교육칙어(勅語)를 넣어 놓는 봉안전(奉安殿)이었다. 교육칙어란 메이지(明治)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한 일종의 교육헌장이다. 이것은 천황제 중심의 군국주의 정치의지를 보수적인 교육이론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 봉안전(奉安殿)은 강진분교(남초등학교)에도 농협 쪽으로 정원 안에 훼손된 탑(塔)이 남아 있었다. 일제는 이토록 철저하게 일본제국주의 동화정책을 강요했던 것이다.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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