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사투리 박물관은 와보랑께가 유일하죠”

1993년부터 민속용품 4천여점 수집, 전시
사투리 박물관으로 전국에 유명세 떨쳐

와보랑께 박물관 김성우 관장이 박물관 주변에 설치돼 있는 사투리 안내판을 보며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와보랑께 박물관 김성우 관장이 박물관 주변에 설치돼 있는 사투리 안내판을 보며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진에는 전국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유명한 박물관이 하나 있다. 바로 병영면 도룡리에 위치한 와보랑께박물관이다. 이 곳은 박물관 곳곳에 전라도 사투리가 적혀있어 관광객들의 미소를 자아낸다.

와보랑께박물관에는 우리가 예전부터 사용했던 민속용품과 고서적, 농사에 사용했던 도구 등이 전시돼 있다.

이 물건들은 김성우(74) 관장이 평생동안 버려진 물건들을 수집해 고치거나 사람들로부터 기증을 받아 모아놓은 것들이다. 김 관장에게는 보물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이다.

93년부터 고향에서 버려진 물건 수집
향후 박물관 운영 방법에 대해 고심중

김성우 관장이 박물관을 찾은 한 관광객에게 물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성우 관장이 박물관을 찾은 한 관광객에게 물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어려운 가정형편속 예술고 진학 실패, 계속된 방황
김성우 관장은 병영 도룡마을이 고향이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7년 병영에서 태어나 병영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김 관장은 아버지가 의약품 장사를 하며 먹고 살았는데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며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관장은 지금은 폐교된 병영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어머님의 도움으로 학비를 내며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김 관장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이 날때면 연필로 그림을 그렸고 마음이 복잡할때에도 그림을 그리며 다스렸다.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생각이 사라졌다.
 

지난 2009년 신축한 와보랑께박물관의 전경.
지난 2009년 신축한 와보랑께박물관의 전경.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지만 가정형편상 학비가 많이 드는 서울로 유학은 꿈도 꿀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형광등을 조립하고 수리하는 곳에서 일을 배웠다. 또 부산과 제주도 등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던 중 결혼을 하게 되고 김 관장에게도 가족이 생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렵게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성우 관장이 만든 특별전시실의 내부 모습.
김성우 관장이 만든 특별전시실의 내부 모습.

이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도시로 일을 하기 위해 떠나던 시기였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도시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김 관장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사무직으로 근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고향에서 생활도 안정됐다. 이 곳에서 밤과 매실 등 농사도 함께 짓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와중에 1996년 낡은 집을 대신해 새롭게 집을 짓게 됐다. 집에 창고도 필요해서 고민하던 차에 집 근처에 폐교된 병영동초 인근에 송전철탑을 세우는 공사현장 사무소가 있었다.

이 곳은 공사가 끝나면서 철거를 해야만 했다. 이에 김 관장은 이 사무실 건물을 창고로 사용하고자 했고 승낙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옮겨왔다.

● 돌아온 고향에서 우연히 시작된 박물관
우연히 옮겨온 이 창고 건물이 와보랑께 박물관의 시작이 됐다. 이 창고를 보고 지인들이 방문해 흡사 박물관과 비슷하다라는 말을 했다. 이때 김 관장은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에 병영성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물관 2층에서 전시중인 다양한 민속품들.
박물관 2층에서 전시중인 다양한 민속품들.

병영성이 복원되면 관광객들이 방문할 것이고 병영성외에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창고에 눈에 띄는 민속품들을 모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김 관장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물건, 폐기처분하여 고물상에 넘어간 것들 눈에 띄는데로 수집하다보니 주위에서 수집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물건을 기증해오기기 l작했고 물건들이 점점 불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박물관의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막내딸이 난데없이 부산 해양대를 진학하게 됐다. 부산에 학교 원서를 사기 위해 갔다가 자갈치시장 앞을 지나게 됐다. 그곳에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라는 말을 하는 것에서 착안해 ‘와서 보아라’는 의미를 담아 와보랑께박물관으로 이름을 붙였다.

와보랑께박물관을 전국에 알린 것은 민속용품보다는 사투리때문이었다. 장흥의 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내 고장에서 쓰는 사투리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이후 사투리에 관련된 여러 가지 책들이나 자료를 모으게 됐다. 또 이런 사투리들을 박물관 곳곳에 나무 판을 이용해 적어서 설치해놓았다.

이로인해 사투리 박물관이라는 별칭으로 전국에 유명해지면서 방송에도 소개됐다. 지난 2006년 5월 당시 KBS2 TV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스펀지에 전국에서 유일한 사투리 박물관으로 소개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달에 거의 1천여명에 육박하는 방문객들이 박물관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면서 강진군에서도 관광자원으로서 가치가 큰 와보랑께박물관 건물 신축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 지난 2009년 전라병영성을 중심으로 체류관광단지 조성을 위한 사업비를 일부 지원해 2층 규모의 현재 박물관 건물로 재탄생했다.

● 사립박물관 한계 부딪치며 미래에 대한 고민
요즘 김 관장은 고민에 빠져있다. 평생 박물관을 운영해온 김 관장이 어느 덧 7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앞으로 박물관의 운영에 대한 고민이다. 최근에도 1년에 5천여명이상의 유료 관람객들이 찾아오는 등 관광자원으로서 가치가 충분한 상황에서 지금보다 적극적인 관광자원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현재는 사립박물관인 탓에 운영이나 확장, 투자 등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이에 전국의 유일한 사투리박물관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군에서 박물관 운영에 나서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김성우 관장은 “70대 중반의 나이가 되면서 앞으로 박물관 운영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전국에 사투리박물관이 유일한 상황에서 보다 군에서 적극나선다면 병영을 비롯한 북삼면의 최고 관광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전국에서 유일한 와보랑께박물관이 앞으로도 계속 계승, 발전되는 것외에 바라는 것은 없고 군에서 나서준다면 적극 도울 생각이다”고 말했다.   


와보랑께박물관 군인용품 특별전

현재 와보랑께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는 의미있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바로 지난 2017년 해남 옥천출신 고 박상진씨가 기증한 물건들을 전시하고 있다.

드라마에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 정교한 모양의 소품용 총과 철모, 전투모, 군복 등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다. 실제 군사용품과 구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모습들이다. 외국 군복들과 군사용품들도 눈에 띈다.

이 물건들은 해남 옥천의 박상진씨가 수집한 것들로 지난 2017년 2월 29살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에 박 씨의 부모님은 아들이 모았던 물건을 그냥 버릴수 없어 와보랑께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물건은 1톤트럭 2대 분량으로 많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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