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남포마을에 퍼진 역병 치료나선 강진 현감 ‘민영은’
주민들 공적비 세워 교훈삼아…죽은 영혼들 ‘천제’로 함께 기려

“오늘날에도 전염병 하나로 이 난리속인데, 그 옛날에는 어땠겠나. 마을에 역병이 돌면 낫는 이들보다 죽어간 사람들이 더 많았어...”

지난 10일 읍 남포마을회관 앞. 높이가 1m50㎝쯤 돼 보이는 비석을 어루만지던 주민 이영식(80)선생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선생의 두 손은 여전히 비석을 감싸고 있었다.

한자가 새겨진 비석은 한눈에 봐도 오래 세월을 겪은 듯 보였다. 비문의 일부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워졌고 또 일부분은 돌 조각이 떨어져나가면서 글자도 함께 사라졌다. 비석에 얽힌 사연이 더욱 궁금해졌다.   

비문의 앞면에는 ‘行縣監閔公泳殷永世不(행현감민공영은영세불)’이라고 쓰인 한자가 선명했다. 본래는 그 아래 ‘忘碑’라는 글자도 함께 새겨져있었으나 비문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글자가 사라졌다는 게 이 선생의 설명이다.

지난 7일 남포마을에서 치러진 천제의 모습이다. 천제는 전염병으로 죽은 영혼들을 함께 위로하는 의식이다.
지난 7일 남포마을에서 치러진 천제의 모습이다. 천제는 전염병으로 죽은 영혼들을 함께 위로하는 의식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光緖 十六年 庚寅 朔 二月’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광서16년 경인, 그러니까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130년전인 1890년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비석은 당시 강진 현감이던 민영은의 공적을 기리고자 남포마을 주민들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민영은이 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남포마을에는 전염병인 괴질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데, 민영은이 귀한 약제를 구해다가 치료하여 많은 주민들을 구제했다는 것이다. 

남포마을 일대는 그 옛날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이 해상교류에 있어 관문 역할을 하다 보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인도 모르고 방역체계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병은 순식간에 퍼졌다. 지금처럼 의료기술마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보니 전염병에 걸리면 낫는 이들보다 죽어간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남포마을에 놓인 공적비다. 과거 주민들은 마을에 퍼진 전염병을 치료해 준 현감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을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남포마을에 놓인 공적비다. 과거 주민들은 마을에 퍼진 전염병을 치료해 준 현감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을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현감 민영은은 약제를 구해와 역병에 걸린 남포마을 사람들을 구제하면서도 전염병이 확산하지 못하도록 환자들을 별도의 공간에 관리하여 접촉을 차단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격리병동을 만들어 운영했던 셈이다. 

이영식 선생은 “구전에 의하면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함께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역병 확산을 막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남포마을 사람들은 전염병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식이나 생활습관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포마을은 올해도 정월대보름 전날 밤인 지난 7일 마을의 서쪽 도로변에 마련된 쉼터공간에서 천제(天祭)를 치렀다. 주로 바다에서 죽었거나 어렸을 때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그 역사가 약 18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천제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제단에는 모두 날 것들만 올린다. 무와 미나리, 조밥이 익히지 않은 상태로 올라가고 숭어와 소고기, 돼지머리도 그대로 상위를 채운다. 단초로워 보이지만 180년 동안 기록으로 전해져 이어가고 있는 차례법이다. 

제단 남쪽으로는 금줄을 치고 100여개의 위패를 촘촘하게 세워 놓는다. 위패는 싱싱한 대나무를 쪼개 그 끝에 창호지에 적은 ‘신위’란 푯말을 끼워 놓는 방식으로 만든다. 바다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영령들을 위한 것으로 후손도 없고 이름도 없는 이들 중 바다에서 생명을 다한 자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의미다. 물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도 함께 위로한다.  

제단 뒤쪽으로는 짚을 이용해 둥그런 자리를 만든다. 그 위에 말린 생선과 마른감태, 떡을 올려놓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주민들이 음복을 하고 천제의식을 마친다.

남포주민들은 “마을이나 지역의 전통문화의 핵심은 그 의미성이다”며 “남포의 천제는 그냥 사라지기엔 너무 아까운 강진의 문화적 자산이다. 때문에 강진군이 정책적으로 보존할 방안을 찾는 일이 하루빨리 마련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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