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의 일본, 앞으로도 계속될 일본
그들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

박상우(93세, 朴相佑) 翁은 일제강점기에 유치원, 소학교, 중등학교을 일본 땅에서 받고 성장했다. 그가 배운 일본역사와 일본사회에 대한 체험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지난날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온갖 고통을 주었다.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은 불편한 이웃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 일본과 경제적, 안보적 이해관계를 갖고 숙명적으로 교류하고 갈등하는 역사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박상우 옹의 기억에 담긴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정리함으로 일본역사를 이해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고자 한다.

일본의 초기 건국역사

일본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보면 아미태라스 아미가미(天照大神)가 그들의 건국신으로 나온다. 그 부하인 니니기노 미고토와 스사노오노 미고토에게 3가지 신기(神器)를 주면서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명(命)했다. 세가지 신기는 옥구슬과 거울, 신검(神劒)을 가리킨다.

진무천황(神武天皇)은 첫 천황으로서 일본을 다스려 만세일계 즉 한 핏줄기의 전통을 이어 현재의 천황까지 다스려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처음 의식주(衣食住)가 미개한 야만인들이었지만 차차 개화가 되어 국가가 형성되어 갔다.

 일본의 건국당시는 아주 낙후된 나라로서 원주민들은 원시적인 종족이었다. 이웃인 한반도의 가야국에서 문화를 배워서 조금씩 개화해 나갔던 것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와 교섭하면서 그들의 선진된 문화를 받아들여 차츰 의식주 수준이 개선되어 인간다운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었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의 나라(奈良)에 호오류사(法隆寺)라는 절을 건축했다. 이 무렵 백제의 불교문화가 일본에 유입되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좌태자(阿佐太子, 572-645년)는 597년 4월에 왜국에 건너가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인들이 일본에 도래하여 집단촌을 이루었고 그들에게 농사짓는 법, 옷만드는 법 기타 필요한 여러 가지 생활문화를 가르쳐 주었다. 백제인들은 일본인의 개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다.

낙후된 일본인들은 본토를 떠나 홋가이도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 살았으면, 아이누 족이라고 불리웠다. 이 때 고구려와 백제인들은 주로 나라(奈良)와 가와지(がわち, 河內)에 집단거주하여 일본에 많은 문화를 가르쳐주므로 일본 문화의 발상지(發祥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를 아스카(あすか, 飛鳥)시대라고 하여 지금도 이곳에 일본 고대문명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1995년 초 필자가 일본 애농회(日本愛農會) 50주년 창립기념행사에 초청받아 미에껭 아오야마(靑山)를 방문했다.

일본 애농회는 1945년 고다니 준이치선생이 “하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라”는 3애 정신으로 출발한 유기농모임이었다. 이어서 일행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적 고도(古都) 나라(奈良)를 관광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동대사(東大寺)라는 고색창연하고도 우람한 목조건물의 절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절 주변에는 사슴들이 방목되어 시내까지도 자유분방하게 대로를 다니고 있었다.

국립박물관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역사문화 수준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금관이라든지 하는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 등은 보이지 않았고, 주로 장적(帳籍)과 같은 민정문서, 호적문서, 토지문서 등을 담은 궤(櫃)가 많았다. 복식문화(服飾文化)도 조선의 의상(衣裳) 문화를 많이 본뜬 듯 했다.

특히 일본인의 머리에 쓰는 모자는 우리 버선을 뒤집어 놓은 모양새여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도공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조선인 도공 이삼평(李參平)은 아리타(有田)에서 처음으로 자기(磁器)를 제작하여 보급시켰다.

아리타의 초기 자기는 청화백자로서 형태와 문양이 조선시대의 것처럼 단순하고 그 질이 우수하여 네델란드인에 의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도공(陶工) 심당길(沈當吉)은 청송 심씨로 남원에서 피납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를 만들었다.

1873년 제 12대손 심수관(沈壽官)이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매화병(梅花甁) 한쌍을 출품하여 서구 세계에 시쓰마도기의 명성을 떨쳤다. 백제의 아직기가 말 두필을 갖고 일본에 건너가 많은 학문을 가르졌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왕인박사(王仁博士)를 천거하였다.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論語)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후에 그가 천황의 자리에 오르자 그야말로 성군이 되어 정치를 잘하고 일본의 문화중흥기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세종(世宗)대왕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일본의 막부(幕府) 정치사

 그동안 많은 군벌들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하는 춘추전국시대가 계속 되었다. 강력한 독재자인 무장들이 정권을 잡아 무단독재정치를 계속해왔다. 그들은 막부(幕府)라는 최고 정치기관을 세워 백성들을 다스렸다. 막부의 권력이 바뀌면 정권도 바뀌는 불안한 정국을 이어오다가, 결국 일본전국을 통일한 무장(武將)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인물이 오하리(現 나고야)에 성격이 아주 급한 오다 노부나가(織田身長)가 먼저 통일의 기반을 잡았다. 이어서 그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했다.

일개 하급무사에서 출발하여 전국을 통일한 걸출한 인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고 강토를 유린했던 우리의 원수(怨讐)이기도 하다. 그도 결국 에도(도오쿄오)의 도꾸카와 이에야쓰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세 사람의 인물에 대한 평은 ‘두견(杜鵑)새’를 울리는 비유로 역사에 회자된다.

에도시대 마츠라 기요시(宋浦凊, 1760-1841)의 수필 ‘갑자야화’(甲子夜話)에 나오는 싯귀(詩句) 말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릴 터이다’라고 했다. 도요토미는 ‘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에야쓰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마’고 했다는 이야기로 세 사람의 성격을 표현했다. 즉 참고 기다리던 도꾸카와 이에야쓰에게 일본천하가 넘어왔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 천황들은 명색이 일본의 주인이었지만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했다. 막부(幕府)에서 주는 적은 재정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조상의 제사에 집중하였다. 지금도 교오토에 가면 옛날 일본 천황들이 살던 집 ‘고쇼’라고 하여 유적으로 남아있다.

필자도 1990년대 초 교오토오를 방문하여 일본의 역대 천황들이 살았다는 궁성에 가보았다. 역사적인 유적이나 유물이 될만한 특별한 것들은 보이지 않고 단순히 널따란 부지 위에 세워진 궁성건물과 정원이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군부막부정치 치하에서는 신분계급제도가 극심했다. 하층계급은 신분이 높은 상류층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계급은 이러했다.

첫째로 ‘덴가’(天下) 최고 권력자요 막부의 장이다. 둘째는 ‘다이묘’(大名)인데 지방의 행정수반이요 무사대장을 가리킨다. 셋째로는 무사(武士) 즉 사무라이를 가리킨다. 넷째는 ‘조오닌’(町人) 즉 일반평민을 가리킨다. 이렇게 신분제도가 고착화되어 지금도 일본인들은 국가나 천황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주의 국가체제가 존속해온 가운데 서양문물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도꾸카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써서 서양문화와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다만 나가사키에 도래한 네델란드인들에게만은 완화정책을 폈다. 네델란드 상인들을 통해서 서양문물이 들어왔다. 병기, 군함, 의료기구 등 새로운 서양과학문물이 들어온 것이다.

서구의 병역제도와 의료제도 등 새로운 문화에 놀랬다. 일부 지식인들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사회의 선구자가 되어 개척해 나아갔다. 특히 신식무기인 총과 대포(大砲)가 수입되자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무사들 대신에 새로 편제된 신식군대가 탄생하게 되었다.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막부는 막을 내렸다. 천황이 친히 집권하는 황정복고가 일어난 것이다. 젊은이들은 미국이나 구라파 쪽에 신사유람단이란 이름으로 파견되어 발달된 서구문화를 접하고 돌아왔다. 이들을 주축으로 일본사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기술력과 국력은 일취월장하여 서구열강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갖게 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일본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힘을 갖게 되자 그들의 침략근성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營圈)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을 내세웠다. 일본은 조선을 불법으로 강점하고 만주에 괴뢰국을 세웠다.

남경학살을 자행하여 중국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영국 등 서구강대국들은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고 수차에 권면했지만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에 자신감을 갖고 중국의 대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던 것이다.

서구열강 지도자들은 즉각 일본의 침략전쟁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즉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 등이 회동하였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차단하기 위해서 석유금수(石油禁輸) 조치를 취하기로 협약을 맺은 것이다.

이것이 소위 ABCD 방어진(防禦陣)이다. A는 아메리카(America 美國), B는 브리티쉬(British, 英國), C는 차이나(China, 中國), 덧치(Dutch, 네델란드)가 석유공급을 끊기로 결의한 것이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된 것이다.

다급해진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었다. 여기에서 수상 도조 히데키의 강경론에 아무도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 야마모도 이소로쿠(山本五十, 연합함대사령관)는 전쟁불가론을 외쳤다고 한다. 그는 미국 하바드 대학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어 미국의 국력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미국을 공격하면 당장 3개월 동안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준비를 끝낸 후 부터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어전회의 석상에서 철저히 묵살 당하고 말았다.

세계 2차대전의 종전과 일본군국주의의 패망
 
“제국육해군은 서태평양에서 미영국(米英國)과 전투상태에 들어갔다” 이와같은 대본영(大本營) 육해군 발표가 라디오 임시 뉴스로 방송되었다. 대본영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천황의 직속으로 최고의 통수권을 행사했던 전쟁지휘부를 가리킨다.

1941년 12월 8일 정오에 소화천황(昭和天皇)은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제 2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투개시는 12월 8일 오전 1시 반에 제1차공격대 183기가 공모(空母)에서 날아갔다. 제 2차 공격은 하와이의 진주만(眞主灣)에 감행되었다.

항내에 정박 중인 미국의 전함을 격파하여 항공기 479기를 파괴, 물론 미군항공비행장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일본이 왜 이같은 전쟁을 대전쟁을 일으켰겠는가? 그 의의(意義)를 일본정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대동아신질서건설은 미(米), 영(英), 프랑스(佛), 네델란드 등의 식민지가 되어있는 아시아의 여러나라를 독립시켜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일본군부내에서는 이 서구열강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었다.

선전포고 이전에 기습작전이 개시되었으므로 서전(緖戰)의 성과에 일본은 들끓었다. 12월 10일 영국의 동양함대에 속한 전함 프린스 오브 웨루스와 레파루스가 일본해군항공대에 의해서 격파되었다. 이어서 12월 18일에는 홍콩(Hong Kong, 香港)의 영국군이 항복하였다.

1942년 2월에는 싱가폴의 영국군이 항복하였고, 그 전에 미군을 돌파하여 필리핀을 일본군의 손에 넣었다. 인도네시아 수도 바타네아(자카르타)를 비롯한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유럽에서는 나치스 독일이 이웃나라를 공격침략하기 시작했다.

전쟁발발 초기에는 일본군이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 등을 공격점령하였다. 일본제국은 매일 승전 뉴스를 퍼뜨렸다. 일본은 일본제국 내의 학생들에게 고무공과 빵과 운동화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섬과 알류산 열도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군 폭격기들은 일본함대를 공격했다.

일본은 여기에서 적성(赤城), 가하(加賀), 비룡(飛龍), 창룡(蒼龍)의 공모 4척을 잃었다. 결국 미군은 일본의 항공모함을 침몰시켰고, 이후 일본은 태평양에서 침략계획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 상륙을 포기하고 6월 4-5일 밤 전면철수했다. 1943년 2월 중요한 거점인 가다루가나루島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사자는 34,000명이었다. 미군에게 태평양제공권을 빼앗긴 일본군은 전선에서 보급이 끊어지므로 공세에서 수세로 대전환되었다. 1943년 연합함대 사령관 산본오십육(山本五十六)의 탑승기가 추락되었으며 5월에는 마쓰쓰島 수비대가 옥쇄(玉碎) 했으며 곳곳에서 패전이 계속되었다.

일본의 패색은 짙어져 갔다. 미국의 반격이 시작되자 일본은 결국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차례로 빼앗기게 되었다. 남양군도 열도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싸움에서 일본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마지막에 최후의 보루라고 볼 수 있는 오끼나와까지도 미군에게 점령 당하고 말았다.

1943년 11월 22일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쳐칠,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삼자(三者)가 카이로에서 5일간에 걸쳐서 회담을 했다.

 결국《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 1) 일본이 1914년 제1차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島嶼) 일체를 박탈한다. 2) 만주(滿洲), 대만(臺灣), 팽호도(澎湖島)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반환한다. 3) 일본이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일본을 구축(驅逐)한다. 4)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독립시킨다. 5) 이를 위해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내는데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참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해방의 종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오는듯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1944년 6월 6일 미국을 비롯한 영국, 케나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Invasion)을 성공시켜 독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다. B-29 미군 전투기가 동경을 폭격하기 시작한 것은 1944년 11월 24일이었다. B-29 공습을 주력으로한 미군기가 매일 일본의 대도시를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마지막에 총동원령을 내려 미군이 상륙하면 죽창으로 싸워야 한다고 국민들을 독려했다.

거듭된 공습으로 견디기도 어려운 판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까지 투하하게 되자 일본은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패전으로 완전히 망가진 일본은 한국전쟁 기간동안에 급속도로 복구가 되어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을 하는 나라가 되겠다고 옛날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공공연하게 우기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는 일본의 잘못된 군국주의 야망을 철저히 경계하고 막아내야 할 것이다. <계속>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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