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염병(疾疫)은 흔한 일이었다. 원인도 모르고 방역체계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병은 순식간에 퍼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전염병이 휩쓴 여러 기록이 있지만 전라도지방 큰 기록으로는 인조때 것이 꼽힌다.

인조 21년(1643) 전라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1만여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진에 대한 기록으로는 중종 37년(1542) 전염병으로 232명이 죽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실록이 전한다.

전염병을 극복해 보려는 필사의 노력도 있었다. 명종 13년(1553) 강진사람 최극충은 부모님이 함께 질역에 걸리자 날마다 부모의 똥을 맛보며 몸의 상태를 살폈다. 요즘 의사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질 일이지만 부모님의 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이 순박한 유생은 아무 거리낌 없이 손가락으로 똥을 찍어 입속으로 가져 갔던 것이다.

최극충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잇따라 죽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극충은 감염되지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최극충은 부모가 하루 이틀 사이에 세상을 떠나자 10여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슬퍼하다 기절하고 다시 깨어난 후 다시 기절하기를 여러차례 하였다고 전한다. 3년상도 지냈다. 최극충의 효성은 군동면 강덕사라는 사당에서 오늘날도 기리고 있다.

근세들어 주로 보이는 전염병 기록은 이질이다. 1934년 8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도암 학장리에서 이질환자가 15명이 발생해 ‘방역당국이 소독에 몰두중’이라는 보도가 보인다. 같은 신문 24일자에는 병영 삭양리와 도룡리, 군동 쌍덕리에서 8명의 이질환자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있다.

해방직후에는 옴이 창궐했다. 1945년 9월 중순경, 그러니까 해방이 된 후 한달도 안됐을 때 강진읍에 난데없이 옴이 퍼졌다. 1945년 9월은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귀환동포들이 대거 들어올 때다. 전염병이 사람을 따라 들어온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옴이 뜸해지자 그해 여름 콜레라가 창궐 했다. 당시에는 강진읍내 사람들이 대부분 공동우물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우익인사이던 차부진선생이 살던 평동마을 집 옆에 공동우물이 있었다.

이 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처음 콜레라 감염 증상이 나타났다. 누군가 평동마을 공동우물터에 걸래를 빨아서 콜레라가 시작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사람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져 민심이 흉흉해졌다.

강진은 오래전부터 해상교통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전염병이 많이 발생한 곳이었다. 많이 겪어 봤으니 극복하는 의지도 강한 곳이 강진이다. 이번 우한 바이러스도 슬기롭게 극복하는 모습을 후세에 전했으면 한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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