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기회 많았으나 20여년 세월 평교사 생활하고 교직생활 마감하다

교직생활을 정리하다.
 

1959년 3월 중앙초등학교 졸업식 기념 교직원 사진이다. 필자의 졸업식 사진이다. 당시 박상우 옹은 몇학년 담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일 뒤쪽 좌측에서 두 번째가 박상우 선생님이다. 맨 아랫줄 중간이 박형태 교장, 다음이 6학년 담임 박병종, 김종대, 박만철, 고광문, 이창부 선생님이다.
작천초등학교 근무를 마치고 다시 강진중앙초에 돌아왔다. 교무주임을 맡아 학교교육 전반에 걸쳐서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박상우 옹이 교직생활에서 가장 친했던 동료들을 회상했다. 강진중앙초에는 박병종, 조기용같은 친구가 있었다.

이 분들은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사로 재직했었다. 박병종은 6학년 1반 담임으로 성실하고 인자한 교사였다. 조기용은 아주 예술가 스타일로 생겼는데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있었다고 필자의 초등학교 동창 한성수(사업가), 이동훈(李東勳, 강진읍장)이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강진농고에는 최용문, 최석진, 손무현같은 목포중학교 동창이 근무하고 있었다. 성요셉금릉여중에는 장원종, 김동길, 김동욱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은 학벌도 좋고 유능한 교사들이었다. 퇴근하면 이들과 어울려서 술자리를 같이 했다. 회포도 풀고 인생이야기, 교육이야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학교교육이 평준화되어 입시경쟁도 없어졌다. 이와 함께 과외수업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6학년 담임을 14년이나 해왔던 박상우의 수입도 대폭 줄어들었다. 생계유지도 어렵고 자녀들 교육비 문제도 심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살길을 마련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퇴직 후 사회진출에 대한 의논은 손아래 동서인 양석주와 하기로 했다. 그는 장사에 경험이 많았다. 장사밑천이 문제였다. 다행히 집사람이 남편 몰래 비축해 놓은 쌀이 있었다. 이것을 매각해 자본금의 일부로 사용하기로 했다. 우선 동서와 함께 부산으로 가서 업종을 살펴보고 선택하기로 했다.

정미소를 경영하는 김석곤의 소개를 받아 목리에서 출발하는 운송선에 쌀을 실었다. 부산에 가서 ‘남일공사’라고 하는 미곡상에 쌀 판매를 위탁했다. 국제시장 골목을 누비면서 여러 업종의 도매상을 다녀보았다. 철물점과 주유소가 이윤은 많으나 적성에 맞을 것 같지 않았다.

지물상(紙物商)을 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업종보다는 이윤이 적지만 깨끗한 장사이고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장사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공무원 출신인 박상우는 관공서에서 종이를 많이 쓰는 것에 착안하였다. 부산 지업도매상 ‘왕자지업사’는 지업계에서 판매고 순위가 전국에서 2위였다. 사장은 과거 중학교 교사 출신으로 동료의식을 갖고 박상우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지물상 이야기를 쓰려하니 원래 장사꾼인 필자의 선친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종이가 포목 다음으로 돈이 많이 드는 장사다’

부산에서 돌아온 후, 상점 하나를 임대하고자 강진 유지인 김유홍(金攸洪, 도정공장)에게 부탁했다. 그는 용도를 묻고 나더니 깜짝 놀랐다. 박상우가 장사를 하겠다는 것부터 반대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공무원 출신들은 자존심 때문에, 유독 자네같은 사람은 도저히 불가능하니 일찍이 포기하라”고 만류했다. 남에게 굽히고 사정할 줄도 알고, 머리를 숙여 아부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네같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어떻게 사업에 성공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말렸다. 박상우에게는 남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해보이고 싶은 결기가 남달랐다. 결국 남성리에다 점포 하나를 월세로 얻어 개업했다. 부산에서 지물이 도착하여 점포에 진열하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사하기가 쑥스러워서 아내에게 맡겼다. 

개업한지 1년이 되었다. 이제는 교직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결단했다. 맨 정신으로 사표를 내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날 밤 술을 몽땅 마시고 밤중에 교장 관사문을 두드렸다. 교장선생이 잠옷바람으로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박상우는 술김에 주저없이 “사표를 내러 왔습니다” 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가정형편과 신상문제를 이야기했다. 사표를 수리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소문이 날까봐 밤에 왔노라고 말했다. 교장은 처음에는 술낌에 장난하는 줄 알았다.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눈물을 흘렸다. 내 정년퇴임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그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실은 학교 제반행정을 박상우에게 의지하고 있던 터였다. 박상우는 이 결정을 바꿀 수 없으니 양해해 주시라고 사정했다. 학년말이라 교무주임으로서 모든 잡무를 마칠 때까지 사표제출 사실을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소문은 며칠 후에 퍼져나가 난리가 났다. 강진교육청은 물론 전라남도교육위원회에서도 사람이 내려왔다. 광주로 전보, 교장승진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면서 희망사항을 수용해 주겠으니 사표만 반려하라고 했다. 강진교육과 전남교육 발전을 위해 손잡고 나가보자고 파격적인 권유를 했다. 대단히 고마운 말씀이지만 ‘내 결심을 바꿀 수가 없다’고 거절해 버렸다.

원래 교육계가 박상우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간의 교직생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학부모와 교직사회에서 유능한 교사로 칭송을 받고 떠났다고 하는 것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자신도 만족했던 것이다.

20여년의 교직생활을 회고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보람을 거둘 수가 있었다.
1)『교육자료』란 교육잡지에 투고를 많이 했다. 중앙초등학교 교무주임 시절에는『교육계획』이란 책을 편집 발행하여 전 직원에게 배부했다. 타교에도 나눠주어 이웃학교의 경영이나 학습지도에 도움을 주었다.

2) 연구발표, 연구수업 등 교육연구를 많이 하여 강진군 최우수 교사상을 받았다.

3) 6학년 담임을 14년이나 하여 중학교 입시에 강진군에서 최우수 성적을 냈으며 윤재식(대법관), 김영재(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 등 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초등학교 교사로서는 지역사회에서 유명인사로 존경을 받았다.

4) 이근수(병영), 윤흥하(도암북), 강의련(강진중앙초), 조성덕, 최동진 교장 등으로부터 특별한 신임과 애호를 받고 당해 학교 운영의 실질적인 기둥이 되었다.

5) 전라남도 교육청 학무과장, 강진군 교육장 및 학무과장으로부터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아 승진의 기회를 가장 많이 받았으나 끝내 고사하고 교육현장에서 평교사로서 인재육성에 전념하였다.

6) 퇴직 후 각 군에서 1명씩 선출하는 교육위원 선거에 강진군 초, 중, 고등학교 교장회의에서 박상우를 후보로 지명하여 비록 정치적 관계로 차점으로 낙선되었지만 많은 교육동지나 지역 사회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젊은 청춘을 정성을 다하고 성실하게 교육을 위해 희생하였다. 이와같은 일들을 생각할 때에 20여년간의 인생 여정의 좋은 추억을 간직하게 된 것을 후회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업의 길에 들어서다.

전라남도 각 시군의 지업사 대표들이 모여 “전남 지향회”(全南 紙香會)란 친목단체를 결성했다. 뜻밖에도 박상우에게 회장이란 중책이 맡겨졌다. 2개월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사업정보를 교환하고 물품을 공동구입하기로 했다.
 
제조회사와 도매상과 가격 타협 등을 했다.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홍보활동도 하고 회원들의 복지향상과 사업신장에 도움을 주는 모임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박상우도 도매업자들로부터 특혜를 받아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강진새마을금고가 부도가 나서 폐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사회에서는 이 금고를 꼭 살려야겠다는 의지로 합심하였다. 이사장을 누구로 추천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도 욕안먹고 신용이 있는 박상우에게 이사장을 맡겨야 한다는 중론이 모아져서 금고를 살려달라고 간청이 들어왔다.

박상우는 금융계통에 전혀 경험과 지식이 없어서 적극 사양했다. 그러나 강진지역사회를 위하는 일이라면서 간청해왔다. 할 수 없이 맡아서 우선 자금유출부터 막는데 힘썼다. 날마다 경찰서, 검찰청, 법원 등에 나가 사건 수습에 힘썼다. 이러한 사법기관 출입을 생전 처음있는 일이었다.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서 동분서주하면서 다녔다. 1년이 지난 후 강진새마을금고를 거의 정상궤도에 올려놓게 되었다.

이사진들은 계속해서 이사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박상우는 끝내 고사하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사업도 본 궤도에 올라 매출이 늘고 운영이 잘 되었다. 강진기관장 회의에서 박상우 옹이 강진 사회를 위해 많은 수고와 공로를 세웠으니 많이 도와야 된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은덕으로 강진군내 모든 관공서를 거래하며 건설회사 등을 상대로 아파트 등 대단위 공사를 많이 맡아 상당한 이익을 냈다. 매주 화요일은 읍․면사무소 청부들이 수요일은 경찰지서, 금요일은 학교 청부들이 등청하면 꼭 ‘중앙지업사’에 들러 물품을 구입해 갔다.

박상우 옹이 경영했던 ‘중앙지업사’ 건물은 일본강점기에 ‘오카다’ 약방이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약방이었다. 이 약방은 한 때 아주 번창한 약방이었다고 한다. 해방직후에는 미군정청 소속의 미군들이 주둔했던 건물이었다.

이 후로 이 건물은 미국공보원(美國公報院)으로 사용되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이 건물에서 위생영화, 만화영화, 반공영화, 대한늬우스 등을 상영해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선친은 바로 이 건물 옆 가게에서 포목상을 운영했었다. 강진농고 학생들이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서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히 떠오른다. 이 건물은 강진 시가지에서는 아주 명물인 큰 건물이었다.

현재 전면을 리모델링해서 상가식으로 개조했으나, 골격과 내부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이 건물은 기와를 자랑했다. 이 기와는 일본강점기 때에 일본에서 제조되어 군동 백금포 항으로 운송되었던 것이다. 80여년이 된 지붕이지만 한번도 수리했던 기억이 없다. 비가 새는 일도 없었다. 특히 이 건물과 연수당 한약방(김병환), 목포여관 앞에는 지게꾼들이 늘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한 때는 오카다 약방 후손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옛집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몇 년 전에는 막내딸이 다녀간 적도 있었다.

인간이란 자신이 살았던 곳을 찾는 귀소본능(歸巢本能, the hohing instinct)이 있는 것이다. 박상우 옹은 일본인들이 방문하면 불편없이 일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가끔씩 일어통역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천리교(天理敎)가 세무서 옆에서 포교를 했었다. 그 천리교 절을 창립했던 주지스님의 딸이 강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박상우를 소개받고 찾아왔기에 통역을 맡아서 해주었다. 또한 그들이 강진에서 살게 된 내력을 듣게 되었다. 신사(神社)는 군청 뒤 북산(보은산) 자락에 있었다. 옛 양무정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각 학교마다 보안정이라는 일본 천왕(日王) 부부를 모신 제단이 있었다. 강진중앙초등학교에는 남쪽 초가지붕 가교사(假校舍) 앞에 있었다. 분교 즉 일본 동소학교에도 탑 형태의 보안정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식민지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하여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일본 궁성을 향하여 절을 하게 한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니 일조동근(日朝同根)이니 하는 표어로 조선사람의 정신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언어도, 정신도 말살시키려고 획책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생존했던 당시 AD 1세기 경 로마제국에서도 지중해 연변의 식민지 백성들에게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황제를 위해 신전을 건축해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4년) 상(像)을 들여 놓고 제사하고 경배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종교의식을 빙자한 로마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

나이도 많아지고 사업의욕도 감소되어가니 장사를 그만 두려고 마음을 먹고 가옥을 처분하였다. 현재는 딸이 살고 있는 나주에 이사와서 박상우 옹 노부부는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이제 지내온 인생을 돌이켜보니 가장 안쓰럽고 미안한 사람이 아내였다.

아내는 양반 출신의 셋째 딸로 태어나 친정에서 비단같이 곱고 예쁘게 성장했다. 아내는 예술적 감각도 뛰어나고, 두뇌회전도 빨라서 내조자로서 남편의 인생에 큰 도움을 준 천정배필이었다. 특히 바느질 솜씨와 음식솜씨가 뛰어났다. 자식들도 엄마의 성품과 솜씨를 많이 닮은 것 같아, 이를 큰 복으로 생각한다. 일본에서 그 엄청난 재산을 파산하고 무일푼의 귀환동포로 귀국한 불행한 가정에 시집을 온 것이었다.

곱고 귀엽게 자란 아내가 박상우같은 허약한 동반자를 만나서 숱한 고생을 했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을 겪을 때면, 풋나락을 훑어다가 찧어서 밥을 지어 주었다. 땔감이 귀한 시절이라 죽재를 풀무로 돌려서 불을 지펴 연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아내는 6남매 장남에게 시집와서 9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
 
위로는 시부모까지 모신 부인이 바로 박상우 옹의 아내였다. 가족이 많았고, 유독 군대생활에서 가져온 빨래감을 가지고 냇가로 나가서 하루종일 세탁을 해올 때가 많았다. 돈을 아낄려고 애들 옷을 혼자 재단하고 바느질해서 입히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알뜰한 아내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박상우 옹은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인생을 살아온 분이다. 필자는 박상우 옹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을 정리하면서 선생님의 맑고 곧은 심성과 학구열을 배웠다. 다음호에는 박상우 옹이 기억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와 태평양 전쟁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마지막은 박상우 옹이 평생을 독서를 하면서 책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독서편력을 정리하면서 마치려고 한다.<계속>/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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