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한 거목이자 주자학의 대가이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주도로 유배가는 도중 강진 남포마을에 도착한 날이 1689년 2월 23일 저녁 무렵이었다.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읍내 동문주막에 도착한 날이 1801년 11월 22일이다. 다산 선생보다 112년 앞서 강진에 도착한 유배길이었지만 음력 11월이나 2월이나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다산 선생이 동문주막의 ‘밥파는 할머니’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면, 송시열 선생은 강진 유생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동문주막 할머니가 반역죄로 유배 온 다산에게 숙식자리를 제공한 것도 큰 배려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왕세자 책봉문제로 숙종임금의 진노를 사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향을 떠나는 83세의 노인을 환대한 것도 강진 유생들의 큰 용기가 필요했을 터다.      

송시열 선생은 제주 배를 타기 전에 백련사에 머물렀다. 많은 유생들이 우암을 알현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우암은 2월 28일까지 머무르며 문생들과 ̒태극도설̓ ̒중용̓ ̒수장̓ ̒대학의 격물̓등을 강론했다.

우암은 3월 1일 백련사를 떠나 남포마을에서 제주행 배를 탔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고 올라가는 길에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고 만다.  

강진의 유림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우암선생 사후 114년이 지난 1803년에 사당를 지어 매년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114년 전 강론을 들었던 강진 유림의 후손들이 그를 잊지 않고 경의를 표한 것이다.

그런데 1908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우암선생이 제주도로 출발할 때 배를 탔던 강진읍 남포마을에 주자의 가르침을 담은 갈필(葛筆: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의 기법) 20판이 해류를 타고 들어와 표착한 것이다.

이 해는 우암이 강진에 체류한지 정확히 두 갑자(甲子: 1갑자는 60년)가 되는 시기였다. 강진의 유생들은 이 우연스런 ‘갈필의 표류’를 필연으로 여겼다. 송시열 선생이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확증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송시열을 모시던 사당에 갈필과 함께 주자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이름을 남강사(南康祠)로 정했다. 남강은 주자가 살던 중국의 지명이다.

강진읍 교촌리 강진향교 인근에 있는 남강사의 갈필은 이렇듯 강진 유림들의 자부심과 보은정신이 깃들여진 곳이다. 강진읍의 주산이 보은산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남강사에 보관중인 주자갈필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갈필은 송시열 선생이 주자의 적통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강진에서 나왔다는 증표다.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잘 보존해서 반드시 후대에 전해야 할 자산이다.<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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