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초는 광주서중 1명만 합격했지만 도암북초등은 2명이나 합격시켰지

박상우 옹이 젊었을 적 근무했던 도암북초등학교의 1960년대 초반 모습이다. 도암면 계라리에 있는 산을 깎아 대지를 다져 산정리에 있던 간이학교를 옮겨 세운 신설학교였다. 병영초등에서 강진초로 옮겼던 박상우는 인공직후 다시 도암 북초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박상우 옹(93세)은 6. 25 전란 당시 강진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인공(인민공화국)의 지배를 겪었다. 이북에서 교무주임이란 사람이 강진에 부임해 왔다. 그는 강진군의 초중고등학교 전반의 교육을 관장했다. 아울러 교직원들의 사상을 관장․통제하면서 교사들을 위압하였다.
 
교사들은 이북에서 내려온 교무주임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강진 일대가 수복된 것은 1950년 10월 5일이었다. 인공이 물러가고 다시 대한민국 세상이 돌아왔다. 학교 교사들에 대한 부역여부를 심사하였다. 인공에 가담하여 부역한 교사는 해직되었다.

박상우 선생
박상우는 심사에서 1차 합격자 90명 속에 들어가게 되어 합격통지를 받았다. 교사들 중에는 2차, 3차 심사까지 거쳐 불합격되어 옷을 벗은 동료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군청, 세무서 등 다른 직장에 취업이 된 교사도 있었다.

교사들 중에서 인공 당시 인민학교 교사들은 이미지가 나쁘다고 해서 강진중앙초등학교 외 면단위, 리단위 학교로 전출시켰다. 박상우는 병영에서 강진으로 옮긴지 3개월만에 도암북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도암북초등학교 시절

도암북초등학교는 도암면 북부에 위치한다. 도암면 계라리에 있는 산을 깎아 대지를 다졌다. 그 위에다 산정리 간이학교를 옮겨 세운 신설학교였다. 학교터 기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한다. 교사 정원은 9명이었다. 동료교사 서재열과 박상우 등 4명이 발령을 받았다.

신설학교라 교육환경이 열악했다. 주민들의 학교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였다. 동네 청년들이 학교 숙직실에다 밀주(密酒) 항아리를 감춰두고 드낙 거렸다. 이들이 무시로 찾아와 숙직실에서 노름을 하는 등 학교를 자기네 놀이터 정도로 생각할 정도였다.

동네 청년들은 학교 교사들을 자기 수하 친구들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불의한 행동을 그냥 못봐주는 성격을 가진 박상우는 이 불량한 청년들에 맞섰다. 때로는 충고하기도 하고, 말을 안들으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학교에 협력하도록 설득했으나 그들은 끝내 텃세를 부렸다. 심지어 마을의 과격한 사람들은 박상우를 건방지다고 찍어서 봉변을 주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 무렵 8. 15 경축행사를 도암초등학교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박상우 교사가 6학년 학생들과 그 자리에 참석하던 중이었다. 도암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로 박상우를 둘러싸고 집단 폭행하려고 다가왔다. 이 때 도암지서에서 경찰들이 달려와 제지하는 바람에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당한 후 박상우는 격분해서 사표를 내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북초등학교 교장과 지방 유지들이 말리는 바람에 겨우 진정하고 교직에 전념하였다.

박상우는 이 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맡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고, 담배를 피우고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여학생들 중에는 화장을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여 도보로 출퇴근하였다. 그러던 중 3회 졸업생들이 졸업 기념으로 자전거 한 대를 사줘서 그것을 타고 다녔다. 그래도 불편해서 학교 앞에 사는 주민 문덕인 댁에서 하숙을 했다. 이분들은 박상우를 교사로 잘 모시고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당시 강진중앙초등학교 교장은 윤주헌(尹柱憲)이었다. 그런데 강진중앙초에서는 광주서중 합격자가 1명 밖에 나오지 못하여 여론이 아주 나빠져 있었다. 도암북초등학교에 박상우가 6학년 담임으로 있는 학급에서 윤재방, 윤국현 두 학생이 광주서중에 합격하였다.

그 외 광주사범, 목포사범 등 도시중학교에 합격해서 시골학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연히 강진중앙초와 도암북초가 비교가 되었다. 강진중앙초라는 군내 중심학교에서 시골학교보다 성적이 현저하게 뒤쳐진 것은 교장이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여론이 파다할 정도였다. 6학년 담임교사로서 박상우의 진학지도 실력은 강진사회에 널리 회자되었다.

보람찼던 강진초등 교사시절

강진군청 행정계 황계장은 국회부의장을 지낸 황성수의 종형(從兄)으로 강진군청의 실세였다. 그는 윤주헌 교장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황계장은 박상우의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되었다. 황계장의 요청으로 박상우는 부득이 강진중앙초에 기동배치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기동배치란 정기인사가 아니라 특정인에게 내리는 긴급발령을 가리킨다. 1952년 10월 1일자 임시 특별 발령을 받아 5학년 담임을 맡았다가, 다음해 1953년에는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필자는 이 해에 강진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담임교사는 윤순옥이었다. 이 때가 바로 한국전쟁이 멈추었던 휴전협정이 있던 해였다. 

강의련(姜義練, 교장, 교육감) 교장이 나주에서 전근을 왔다. 이 때가 한국전쟁이 멎은 직후 무렵이었을 것이다. 강의련은 부임하자마자 강진중앙초의 낙후된 교육방향과 행태를 파악했다. 그는 교육 선진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강진중앙초 교사들의 정신개조부터 시작했다. 새로운 교육사조에 맞는 선진된 교육과정으로 새 교육을 시작하도록 독려하고 가르쳤다. 강의련 교장은 대단한 실력가였다.

매일 교장으로부터 교육학, 커리큘럼(curricurum, 교육과정), 가이던스(guidance, 교육지도과정) 등의 새로운 교육용어를 듣고 배웠다. 이렇게 강의련 교장이 교육쇄신에 힘쓴 결과 부임 1년 후에는 전라남도 지정 새교육 연구 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강교장은 박상우 교사에게 미술에 대한 연구수업과 발표를 하라고 지시했다. 박상우는 미술교육 방면에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대학교수나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들의 자문을 받기도 하고 실기도 익혔다. 결국 별 실수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다음해에는 보건과 연구발표를 한다고 무용지도에 대한 명령이 떨어졌다. 많은 교사들 중에 하필 박상우에게만 이런 난제를 수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런 때마다 강의련 교장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한편 자신을 신뢰하여 학교의 위상이 걸린 막중한 과제를 맡겨준데 대해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여름방학 중에 광주에서 한 달 동안 무용 강습을 받고서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강의련 교장은 교육관이 뚜렷하고 일본어, 영어 등 어학에도 조예가 있어 선진화된 국가의 서적을 많이 읽은 교육의 선구자였다.

그는 박상우의 실력을 이미 알아보고, 기대가 컸기 때문에 혹독한 주문을 했던 것이다. 여러 학교의 교장을 모셔보았지만 이 분이야말로 존경 받을만한 스승이었다고 박상우 옹은 회고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을 기억해보니 강의련 교장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머리가 훤출하게 벗겨진 교장선생님이셨다.

부인은 교장 사모님에 어울리지 않게 트럭을 갖고 곡물사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모님은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사모님이 곡물사업을 하면서 끌고 다니는 트럭이 잘 고장나서 ‘교장차’가 아니라 ‘고장차’란 우스개 소리가 인근에 회자되곤 했다. 자녀들을 여럿 둔 것으로 생각나는데 그 중에 교장 따님인 강현숙이 필자가 3학년 때 박정기 선생이 담임했던 한 반이었다.

강현숙은 지금까지도 눈동자가 새까맣고 별처럼 초롱초롱한 예쁜 소녀로 기억되고 있다. 교장 사택은 시내에서 영당 쪽으로 올라가자면 학교 모퉁이 길 가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는 일본식 이층집이었다. 교장 관사 옆에는 당시에 화분이 가득했던 온실이 있었다. 그 앞에는 김연희 선생의 큰 아들 필자의 초등학교 동창 차경렬이 살았던 평교사 사택이 있었다. 
  
강진중앙초 시절 상급학교 진학지도 이야기

지금은 학부형들이 자녀들의 대학입시에 온갖 관심을 기울인다. 일찍이 1950-60년대 우리 사회는 대학보다 우선 중학교 입시에서부터 내 자식을 소위 일류중학교에 보낼려고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다. 당시 교사들의 소망은 6학년 담임을 맡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6학년 담임배치에 신경을 썼다. 광주서중과 전남여중의 합격률이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교전체의 명예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6학년 담임을 맡던 어느날 학년주임이 강진유지들 자녀들을 자기반에다 편성을 해서 넣었다. 소풍날 박상우는 부끄러운 꼴을 당했다. 다른 반 교사들에게는 도시락이랑 선물이 많이 들어왔다. 박상우 교사의 반에는 담임에게 점심 도시락 하나 갖다 주는 학생이 없었다. 시골에서 왔다고 동료교사들이나 학부형까지도 괄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경과 차별을 겪으면서도 광주서중을 비롯한 중학교 진학 성적이 월등하자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역사회에서도 소문이 널리 퍼졌다. 당시 강진농고에 김종대 교장이 부임해왔다. 부인은 일제 강점기 경성사범 연수과 출신으로 1종 훈도 자격을 갖춘 여교사였다. 강진농고 교장은 자신의 둘째 딸의 6학년 담임을 박상우 교사에게 맡겨달라고 중앙초 교감 마중현에게 부탁해왔다.
 
할 수 없이 승낙하여 담임을 맡았다. 김교장은 매일 학교에 나와 박상우 교사의 수업을 참관했다. 박상우의 지도방법과 지도기술에 대해 토론도 하고 간섭도 했다. 교육계 대 선배에게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결국 한 달 후에는 박상우 교사를 신임하고 잘 맡긴다고 하면서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참으로 극성스러운 학부모였다. 김교장의 딸은 무난히 전남여중에 합격했고 전교 1등으로 도지사상을 받았다. 김교장의 딸은 필자도 생각이 나는데 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민자였다.

학부형 중 의사인 박노북(강진의원 원장)은 자녀교육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낮에는 병원을 운영했고 밤에는 진료를 조수에게 맡기고 아이들 교육하는데 조력을 했다. 아들은 광주서중에, 딸 둘을 전남여중에 합격시켰다. 강진유지 김유홍(도정공장)도 아들 셋을 모두 광주서중에 합격시켰다. 이분들은 자기 자녀교육을 위해 교사 박상우의 도시 진출을 말렸던 분들이었다.

광주서석이나 사대부속국민학교에서 박상우 교사를 스카웃하려고 여러번 교섭해 왔지만 번번히 길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당시 6학년 담임들은 직원조회나 종례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수업을 시작하여 일몰이 되서야 끝마쳤다. 매일 시험을 치루기 때문에 가리방(がりばん, 등사판) 원지를 긁고 등사(謄寫, copy)를 했다.

시험 결과를 검토하여 부족한 분야를 집중 지도했다. 밤에는 도시로 응시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과외수업을 했다. 여름방학도 없이 수업을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박상우가 담임한 학급은 언제나 타학급에 비해 성적이 월등히 좋았다. 졸업시 입시 합격률이 높아 지역사회에서도 알아주었다. 따라서 승진의 기회도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냥 평교사로 만족했던 것이다.

작천초등에서도 근무하다.

광주 5. 18 민중항쟁 이후, 신군부세력인 전두환이 집권하였다. 교육계에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같은 학교에 10년 이상 장기근속자는 다른학교로 전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교육구청도 없어졌다. 군청에다 교육과를 두었던 것이다. 나경수가 교육과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교육당국의 지시에 따라 작천초등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당시 교육당국에서 박상우 교사에게 부임하면 사회과 연구발표를 하여 정상적인 학교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막상 부임해놓고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장은 부재중이었다. 교직원 대부분은 지방의 부농들이었다. 이들은 학교 교사는 부업이고, 농사가 주업인 것 같았다.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농사자금을 벌어들이는 기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가 오면 학생들은 방치하고 자기 농토로 가버렸다. 틈만 나면 학교 앞 주점에서 술타령이었다. 연구발표가 문제가 아니라 학교와 학생들의 장래가 큰 일이었다. 학교풍토부터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박상우는 직원회를 열어 말문을 열었다. “저는 선생님들과 같은 평교사여서 여기를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귀여운 자녀들의 장래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어 봅시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하나로 모읍시다”라고 간곡히 설득하였다.

이 때 지역출신 젊은 교사들이 듣고 일어나 “마음을 모아 한번 잘 해봅시다”하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나서 주었다. 이 때부터 낮에는 학교와 학급의 환경개선에 힘썼다. 밤에는 11시까지 특근을 하면서 교육고정연구, 학습지도법개선 등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 학교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학교환경이 개선되었고, 수업지도 방안도 발전이 되어 연구발표회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이 무렵 박상우 교사의 가정은 처음으로 부부가 객지에 나와서 시부모 슬하를 떠나 학교관사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다. 이웃 사모님들과도 친분을 쌓고 잘 지내게 되어 가난했지만 모처럼 행복감을 느끼고 살았던 시절이었다.(계속)     /출향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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