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은 강진의 좋은 인심 풍요로운 삶 상징

2020년 경자년 새해 아침, 군동 금사봉 뒤쪽으로 희망찬 태양이 솟아 오르고 있다. 북동쪽에서는 탐진강 물이 강진만으로 흘러 들어오고, 풍요로운 강진만은 풍성한 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강진은 금릉이란 이름이 손색없는 곳이다. <사진=김응곤 기자>
앞서 설명했듯이 강진의 별호 금릉은 중국 남경의 옛 이름으로 중국의 오랜 수도였다. 고려성종이 강진에 금릉이란 별호를 내렸던 991년은 시기적으로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청자가 만들어질 때와 일치한다.

이 시기는 아직 상감청자란 최고급 청자는 나올때가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말 중국의 저장성(浙江省.절강성) 월주요쪽에서 들어와 이제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대량생산체제에 나설때이다. 강진청자는 이때부터 고려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발전했다.
 
강진청자의 활성화는 왕권이 강화되는 광종에서 성종 연간의 강력한 국가 체제 정비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성종임금은 강진에 금릉이라는 별호를 내렸으니 금릉과 청자는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지 않을수 없다.

중국의 수도 이름과 같은 금릉

월출산 계곡에 있는 금릉 경포대의 모습이다. 금릉이란 지명을 붙힌 강진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같은 월출산이여도 영암쪽에는 금릉이란 지명을 붙힌 월출산 관광지가 없다.
중국(남송)의 수도 금릉(지금의 남경)은 청자의 주산지 월주와 인접해 있다. 같은 저장성안에 금릉과 월주가 있다. 월주요 생산 청자의 주 소비처가 바로 수도 금릉이였다.

당시 고려와 남송은 해상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고려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에 국제무역항을 운영했다. 송나라 상인들은 배를 타고 올라와 비단, 차, 약재, 책, 옥, 악기, 물소뿔, 상아 비취, 공작새, 앵무새 등을 가져와 팔았다.

고려상인들은 삼베, 모시, 인삼, 한지 등을 수출했다. 또 지금의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에 남송과 무역을 했던 국제항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마도 고려사람들에게 중국의 수도 금릉은 청자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통용됐을 것이다. 중국의 자기는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고려의 여러 유적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물이다.

지난 2월 성전 월남사지 시굴조사에서 중국 송나라때 흑자완이 발견됐다. 월남사는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이 중창했다는게 정설이다. 1196년 최씨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이 권력을 잡았다.

최충헌은 장흥 출신 공예태후의 아들 신종을 왕위에 올리며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이어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가 정권을 잡아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최우의 아들인 최득전이 출가해서 월남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는 청자의 최대 전성기인 12, 13세기와 맞물린다.

고려 성종이 991년 강진(도강)의 별호를 금릉이라고 정한 것은 아마도 이같은 청자 생산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고려 왕실은 강진을 금릉이라는 별호를 정함으로서 남송의 수도 금릉에 못지 않은 청자생산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는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훗날 12세기 들어 강진에서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상감청자는 남송으로 수출을 하게 된다. 남경(금릉)의 남송시대 황궁터에서는 고려의 상감청자 편이 수도없이 발견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을 가지고 온 반도체 기술이 지금은 세계 최대 생산국이 되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1990년대 초반 칠량 봉황앞바다에서 바지락을 채취하는 주민들의 모습이다. 넓은 바다가 거의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강진은 바다와 산, 들판에서 먹거리가 풍부하게 나오는 곳이었다.
과연 강진의 별호 금릉은 고려왕실이 강진을 남송의 수도 금릉처럼 청자의 본거지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까. 금릉의 의미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강진의 지명중에 금(金)이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은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강진에는 유난히 금(金)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이런 지명이 고려시대때 별호로 정해진 금릉(金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금’자가 붙은 지명이 강진을 잇는 큰 맥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를 풀어보자.

지금도 금릉 이름 많은 강진

강진의 북쪽산 월출산 아래에는 금릉 경포대가 있다. 이곳의 물이 흘러 흘러 탐진강으로 유입된다. 우선 금릉경포대의 물은 성전 신풍리에서 무위사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수한다. 또 성전면소재지에서 밤재에서 내려온 물과 다시 만나 작은 하천을 이룬다.

이 강의 이름이 금강천(錦江川)이다. 금강천은 작천으로 내려간다. 성전에는 금당마을이 유명하다. 작천 용정마을은 동음지(冬音志)에 금릉경승지라고 불리었다고 소개돼 있다. 금강천의 물은 병영에서 옴천쪽에서 내려온 물을 만나 넓은 강을 만든다.

작천에서 막 까치내재를 넘으면 금곡(金谷)마을이 있다. 금곡마을 뒷산에는 금곡사(金谷)가 있다. 금곡마을에서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백금포(白金浦)가 있다. 군동에는 금강리도 있다. 백금포에서 탐진강을 넘으면 금사리(金沙里)가 있다. 금사리 바로 뒷산의 이름은 金沙峯(금사봉)이다.

금(金)자가 붙은 지명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월출산에서부터 성전~작천~군동에 이르기까지 긴 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넓은 들이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은 간척지가 만들어져 도암과 신전등에도 논이 많지만 옛날에는 성전과 작천, 군동, 강진읍에 논경지가 집중돼 있었다.

강진에는 금릉이란 상호를 붙힌 간판도 수두룩 하다. 우선 몇 년전 도로명 주소가 생기면서 금릉길이란 도로명이 생겨났다. 강진읍 평동리 일대가 금릉길이다. 여기에 금릉서예한문학원, 금릉카센터, 금릉빌라, 금릉보쌈왕족발, 금릉씨푸드, 디지털LG금릉대리점, 금릉세차장, 금릉철공소등 번창중이다. 금릉과 강진사람들은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금릉을 통일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 강진지역의 한 지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군동면이나 병영면이라고 불리는 소단위 지역명칭을 말하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강진의 지명은 백제시대때 도무군과 탐진현이였다가 통일신라시대때는 양무군으로 소속됐다. 양무군은 강진군 일대와 해남군 일대를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였다. 물론 기록에 당시의 강진내에 금릉이란 지명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금릉의 위치는 강진읍 신풍마을 뒤쪽이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곳이 1천여년전에 요즘으로 말하면 강진읍내였다는 것이다. 신풍리 뒤쪽 골짜기를 가보면 다랑치논들이 즐비한가운데 여기저기에 돌담들이 산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촘촘하게 쌓아올린 돌담들이 논의 둑이나 밭의 둑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은 논둑으로 바뀌었지만 높은 것은 2m가 넘어보이는 돌담도 있어 아주 오래전에 민가의 담이나 공공건물의 축대로 사용됐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시설물들이다.

신풍마을을 금릉의 치소로 보는 사람들은 이곳에 군청소재지가 있던 지역이라고 본다.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이 일대는 금성(金城)이라는 명칭으로도 전해온다. 요즘에 강진읍 남성리, 동성리 하듯이 이곳의 이름이 금성리였다는 것. 금성과 연관된 지명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곳이 많다.

지척에 있는 마을이 금곡(金谷)마을이다. 그 위쪽에 금곡사(金谷寺)가 위치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금실등이란 야산이 있고 신풍리 뒤쪽 보은산 우두봉아래 큰 골자기는 금성안골이라고 전해온다.

아무튼 강진의 별호였던 금릉이란 명칭은 그 의미와 사연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그 이름 자체로서 강진사람들에게 신비의 대상이자 우리가 사는 지역을 그렇게 만들고 싶은 이상향이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림옥향의 명성을 잇자

우리의 조상들은 금릉을 소재로 해서 많은 한시를 남겼다. 금릉팔경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한시다. 조선시대 공공건물에 금릉이란 명칭을 많이 넣었다. 조선시대 외부 손님들이 머물던 강진의 객사 이름은 금릉객사였다. 강진의 교육기관에는 하나같이 금릉을 앞에 넣었다.

오늘날 금릉의 의미는 어떻게 계승되고 있을까. 1973년 강진군민들의 문화축제 이름이 금릉문화제로 정해진 배경을 다시한번 소개하면 그 의미가 새롭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1973년 당시 강진군은 문화축제의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전 주민들 대상으로 명칭을 공모했다. 그 결과 금릉문화제로 하자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와 문화제의 명칭을 금릉문화제로 결정했다고 한다. 금릉문화제 행사의 의미에 대해 강진군정 50년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문림옥향 강진을 대내외에 선양하고, 탐진강 젖줄기에 오곡백과가 풍요로운 살기좋고 인심좋은 우리고장을 가꾸는 맥락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금릉은 강진사람들에게 문림옥향과 풍요, 좋은 인심을 상징하면서 오늘날에도 대외적으로 강진을 상징하는, 강진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는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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