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채 선생 “왜 하필 선생질이냐 그것은 남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야”

박상우 옹이 1947년 10월 1일 교사로 첫 부임한 병영북초등학교 교정의 모습이다. 병영북국민학교는 1913년 병영 세류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어서 1941년 북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6년 병영남국민학교를 흡수했다. 6.25때 건물과 서류가 모두 불탔다가, 1958년 병영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동아전쟁의 참상을 일본에서 청소년기에 겪은 박상우는 18세에 한국에 귀환했다. 새해에 나주에서 박상우 옹(93세)을 뵈었다. 강진 출신 의사요 초등학교 후배인 오경규(나주빛가람요양병원장)가 점심자리에 모신 것이다.

박상우 옹은 강진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學而時習, 9旬의 박상우옹〉을 보고 나서, 필자에게 하신 말씀이 ‘벨 것도 아닌디, 우세나 안 살란가 모르것네’하셨다. 그래서 필자가 ‘아니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 덕분에 일제강점기 통한의 역사와 대동아전쟁전후 참상을 새삼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체험적 인생과 고매한 인격을 후학들이 잘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다. 박상우옹은 일생을 공부하는 삶을 살았다. 평생 독서하신 덕분에 박학다식한 인물이지만 어디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품이 아니다. 박상우 옹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강진의 숨은 역사다. 생존하시는 고령층 인물 중에 거목이시다.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다.

박상우는 일본에서 성공한 부잣집 도련님 대접을 받다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급낙한 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초등, 중등학교 과정을 거쳤다. 한국말보다는 일본어에 익숙했다.

조선역사를 잘 알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고국에 돌아오니 당장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발음도 일본식 발음이었기에 더욱 우리 생활습관과 문화에도 익숙하지 못했다. 동생 박상익에게 우리글 한글을 배웠다.

이 무렵 전라남도에서는 귀환동포 학생들을 도내학교에 편입시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려는 정책이 실시하고 있었다. 박상우는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목중(목포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시에 목포를 가려면 용댕이(용당)에서 도선(渡船)을 타고 목포선창에서 내렸다.

차츰 한국의 풍속과 생활에도 적응해 나갔다. 당시 목포중학교 교장은 조정두였다. 그는 강진 병영출신으로 일본 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는 박상우가 일본에서 명문인 ‘부립 오사카 후리쓰 돈다바야시 중학교’(大阪府立富田中學校) 출신인 것을 인정해 주었다. 박상우를 각별히 사랑하고 격려해 주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라는 당부도 해주었다. 목포중학교는 건물이나 교육시설이 일본에서 박상우가 다니던 학교와는 천지 차이였다. 학생들의 실력이 너무 낮고, 일본 명문중학교에 비해 교육이 후진적이어서 학교에 다닐 기분이 별로 나지 않았다. 학우들과는 성장과정이나 문화경험이 너무 달라서 잘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새나라의 건설에 참여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갔다. 학교생활은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에 몰두하였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형제들의 학비조달문제가 난감하였다. 형제들 모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동생 박상희는 학업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밀항했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체포가 되어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이나 구류처분을 받아 감금되어 있다가 석방되어 돌아왔다. 동생은 고향에 돌아와서 국민 방위대 장교 교육을 받고 강진군 편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병영북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다

당시 시골에서는 마땅히 취직할 자리가 없었다. 박상우에게는 교원생활이 가장 적합할 것 같았다. 그 동안 동리의 야학교에서 국어선생을 한 경험을 살려 강진서초등학교에 강사 생활을 했다. 박상우는 목포중학교에서 공부한 덕분에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었다.

1947년 10월 1일자로 병영북초등학교 준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박상우는 병영이란 곳을 몰랐다. 마침 ‘남해호랑이’란 별명을 가진 토착유지 차종채(車鐘采)가 계모임으로 병영에 가는 길에 따라갔던 것이다. 군동에서 돛고개(돈고개)재를 넘어 화방리 앞을 지나서 병영으로 갔다.

강진의 유력자인 차종채는 박상우에게 ‘인물은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하필 선생질을 하느냐? 그것은 남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야’하면서 기왕 나선 몸이니 한 6개월 쯤만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충고해주었다.

당신의 아들 차운영(車運營, 전남도의회의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차운영도 학교 교사를 2년만하고, 그 길을 떠나서 다른 길로 들어 성공했다는 것이다. 계모임은 작천면 이남리 천석일(광신상회) 댁에서 치러졌다.
 
천석일은 필자의 고모할아버지로서, 천종선(사업가)의 조부이다. 일제강점기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강진에서 포목상을 가장 크게 한 전형적인 병영 상인이었다. 박상우는 계모임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진수성찬을 맛보았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병영 유지들을 소개받았다. 병영 유지들은 박상우를 인물이 잘나고 전도가 양양한 청년으로 인정했다. 부임도 하기 전에 병영 유지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병영사람들은 개성사람들에 못지않은 천부적인 상업수완이 있었다. 산모가 애기를 낳으려고 진통할 때, ‘아나, 잣대’ 또는 ‘아나, 수판(주판)’하면 순산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병영은 돈이 많고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병영면 소재지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맵시있게 잘 차려 입고 다녔다.

성격도 밝고 활달한 편이였다. 병영은 일찍이 개화되어 남녀간의 연애결혼에 대한 이해심도 타지역에 비해 수준급이었다. 병영처녀들은 객지에서 오는 관공서 직원이나 직장인 총각들에게 넌지시 접근해 오는 수가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병영학교는 27학급이었다. 교사들 대부분은 병영유지 자제분들로 가정이 부유했다. 일제강점기 중학교 등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좋은 직장을 얻기 전에 임시방편으로 학교교사로 나와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객지에서 온 교사는 4-5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박상우는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교사들 중에 중학교 동창이 있어서 박상우를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학교앞 식당에서 밥을 사먹었다. 병영북교 옆에는 병영남교라는 일본인 학교가 나란히 있었다. 교장관사가 비어 있었다. 비금도에서 온 동료교사와 같이 관사에서 자취를 하기로 했다.

쌀, 반찬 등 식재료는 주로 박상우가 댔다. 동료교사들도 늘 숙소에 놀러왔다. 이근수 교장도 자주 들려주었다. 친자식처럼 살갑게 대해 주었다. 박상우는 처음에는 3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료교사들은 6학년 담임을 맡기를 꺼려했다.

박상우는 기초학력이 우수하다 하여 결국 6학년 담임을 맡았다. 당시 해방직후 일제 때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학생들이 몰려왔다. 학생들 중에는 박상우 교사와 연령이 비슷한 나이배기 학생도 있었다.

당시 병영북교에는 일본인 학교까지 합쳐 관사에 2대, 합해서 오르간(풍금)이 5대나 있었다. 교사 중에 오르간을 사용하여 음악수업을 하는 선생은 드물었다. 박상우는 일본에서 음대를 나온 박주순(朴珠淳, 도립병원서무과장) 당숙 집에 갔다가 풍금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사를 하느냐고 꾸중을 들었다.
 
이후로 당숙의 권고를 받아들여 꼭 오르간을 마스터하기로 결심했다. 음악서적을 사서 기초와 이론을 공부했다. 사범학교에서 배우는 오르간 교본을 빌려다 방과 후 밤에 연습을 했다. 결국 6개월 후에는 음악교사가 되어 음악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국경일이나 궐기대회 등 면민 행사는 꼭 학교운동장에서 했다. 그때마다 박상우는 단상에 올라가 애국가 봉창을 ‘콘닥트(지휘, coduct)’를 했기 때문에 병영면내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교사가 되었다.

운동회나 학예회 때 음악 반주는 꼭 박상우가 했다. 당시 학교내 행사는 학부형은 물론 면민 전체가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던 시기였다. 이근수 교장은 박상우의 음악 실력을 인정하여, 병영북교 교가(校歌)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심혈을 기우린 끝에 정감이 가는 병영초등학교 교가를 작곡하여 부르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박상우 작곡의 교가가 불리워지고 있다. 면내에서는 멋쟁이 총각선생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렸다. 여러 번 처녀들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애 한번을 못해보았다. 혹 성(性)불구자가 아닌가 의심까지도 받았다고한다. 처녀들이 건방지다고 협박(?)하는 일까지 종종 있었다.

한번은 순천여고를 나온 병영면에서는 소문난 재원(才媛)이 자기 오빠를 통해 적극적으로 구애해 왔다. 박상우는 자신의 가정환경과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하여 사양하고 거절해버렸다. 병영면에서의 교직생활은 박상우의 첫 사회진출이었으나 그런대로 낭만이 있었고, 추억에 남는 첫 교사부임지였던 것이다.

6. 25때의 교사생활
 
여느 지역이나 그렇지면 병영은 한마로 텃세가 센 고장이었다. 학교 안에서는 객지에서 온 교사가 조금 두각을 나타내려 하면 박해를 하면서 괴롭혔다. 박상우는 조항규, 장원 등 지방 유지자제들과 교분이 두터워서 그렇게 객지를 타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교장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고 사표를 내밀었다.

그러나 교장은 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자신이 꼭 강진에 전출되도록 힘쓰겠다고 적극 만류했다결국 사표를 반려했던 것이다. 박상우는 1950년 7월 1일자 강진중앙교로 전출명령(기동배치)를 받았다.

이 때는 38선에서 이미 6. 25전쟁이 발발한 때였지만, 지방에 까지는 공산세력이 미치지 않았다. 강진군에서는 박상우 혼자 기동배치를 받아 6. 25사변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29일 강진군을 방어하고 있던 경찰병력이 후퇴했다. 8월 1일 인민군은 영암 풀칠재(풀치, 불티재)를 넘어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강진에 무혈입성(無血入城)했다. 인민군 제6사단 예하부대가 강진에 진주했던 것이다. 강진에 배치되었던 병력은 주로 치안연대 예하병력들이었다.
 
인민군 치안연대는 보성, 장흥, 해남 일대에 각 예하부대를 배치하여 점령지 정책을 지원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이날 야간부터 군, 면, 부락별로 전평, 민청, 여맹 등 지방 좌익들의 안내를 받아 각 기관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인민군은 정치보위부 직원들이 치안을 접수한 후 군청에다 강진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청업무를 접수하게 했다.

병영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와 공산치하가 되자 박상우와 같이 병영북교에 근무하던 장정원이란 친구가 병영면 인민위원장이 되어 활동했다. 동료교사 8명이 장정원에 동조하여 활동하다가 인공이 후퇴하게 되자 모두 입산하여 전원이 사망하였다. 하숙집 동료교사 김상섭도 같이 휩쓸려 죽었다고 했다. 박상우는 이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수복 후 그 병영 하숙집을 찾아 갔더니 ‘자네가 가지 않았다면 우리 상섭이도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인디...’라며 그의 부친은 비통한 표정으로 울먹이면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김상섭의 부친은 오사카에서 상당한 규모의 포목상을 경영했다.

박상우의 부친이 오사카에서〈연수당한약방〉을 경영하던 한인유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인연으로 더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김상섭의 부친은 부인과 사별한 후 성전면 장남댁에서 살았다. 박상우는 몇 번 찾아 뵙고, 갈 때마다 용돈도 드리고 위로해 드렸다.

청년교사 박상우는 지성과 인정을 겸한 마음이 따뜻한 교사상(敎師像)을 지니고 있었다. 인공치하라 휴교중이었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낙인 찍힐까 두려워서 출근하였다.

학생수업은 하지 않고, 주로 학교청소와 사상교육을 받았다. 이북노래도 가르쳤다.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았던 80세 이상의 노령들은 당시의 정황을 기억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주로 인민군 선전선동대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노래제목은〈김일성 장군의 노래〉라고 기억하고 있다. 첫 대목은 이러했다.

/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우에 /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 여기에는 무슨 사상도 주장도 없다. 언젠가는 남북의 우리 민족이 한데 어울려서 서로의 애창곡을 가슴 터놓고 부를 날을 앞당겨야 할 것이다.

북측의 동포들도 남측의 민주화 운동가요인〈님을 위한 행진곡〉통일목사 문익환이 작사한〈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뜨겁게 함께 부를 날을 애타게 기다려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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