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금릉(金陵)을 다시 생각한다

1978년 보은산 중턱에서 바라 본 강진읍 동성리 일대 모습이다. 초가집이 보이고, 보리밭에 보리가 파릇파릇 한 것으로 봐서 겨울철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70년대는 금릉문화제가 한창 열릴 때로 강진에서 금릉이란 별호가 주민들 사이에게 가장 친근하게 사용된 시기이기도 하다.<사진=강진향토사>
새해 새날이 밝았다. 멀리 군동 금사봉에서 올라온 새해 햇살이 강진만을 비추고 있다. 북쪽으로 월출산이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고, 탐진강이 기름진 들녘을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든다.
 
사실 들판이라는게 요즘 흔한 것이지 오래전에는 귀했다. 간척지가 없던 시절, 강진은 논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부자가 많았다. 동순천, 서강진 하던 시절이 바로 그때다. 그래서 그랬을까. 오래전 강진은 금릉(金陵)이라 불리었다,
 
새해 새아침, 금릉의 의미를 되세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강진 사람들의 자부심이 커지고, 2020년을 개척해 나갈수 있는 힘이 더 커진다면 이번 인문기행은 더할 나위가 없다. 두차례에 걸쳐 금릉과 함께 인문기행을 떠나보자. 

 풍요로운 강진 상징하는 별호

강진의 가장 오래된 군지로 평가받는 작천의 박병채 선생 소장본 군지 이름이 ‘금릉읍지(金陵邑誌)’다. 이 책은 1896년경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릉(金陵), 이름만 들어도 호사스러워 보인다. 금릉은 강진의 별호(다른 이름)였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에 금릉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에 ‘도강의 별호는 금릉이다’라고 적었다. 도강(道康)은 고려시대 태조 23년(940년)부터 조선 태종 17년(1417년) 강진현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500여년 동안 사용했던 우리지역의 지명이다.

금릉이란 별호가 도강이 태어날때부터 사용됐다면 그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금릉이란 지명은 흔한 지명이 아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경상북도 김천시가 오래전에 금릉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었던게 국내에서 유일하다. 또 금릉은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남경의 옛 이름이었다. 남경은 춘추시대 오ㆍ월ㆍ초나라 때까지 금릉으로 불리다가 다시 건강으로 바뀐 후 청나라 들어 다시 금릉으로 불리었다. 금릉은 이 때문에 도읍이라는 이미지, 수도라는 이미지, 살기좋은 곳, 부자인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짙게 풍긴다.

조선왕조실록에 금릉과 강진을 연관해서 설명한 기록은 세종실록 외에는 없다. 공식 국가 문서에 금릉이란 명칭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릉이란 명칭은 오랫동안 지역내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며 강진사람들의 가슴속에 흘러내려온 이상향 같은 지명이었다.

전해저 오는 가장 오래된 강진군지로 평가받는 작천의 박병채 선생 소장본은 그 이름이 ‘금릉읍지(金陵邑誌)’다. 이 책은 1896년경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국가문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금릉이란 지명은 읍지에 사용할 정도로 지역내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회(景晦) 김영근(1865∼1934) 선생이 강진의 빼어난 경치 8곳을 노래한 한시의 이름도 ‘금릉팔경(金陵八景)’이었다. 월출산의 오래된 관광지 경포대의 정확한 명칭은 금릉경포대이다. 금릉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강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던 지명이였던 것이다.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경남 김해시에도 금릉팔경(金陵八景)이란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진의 금릉팔경이 지어지던 때와 비슷한 시기인 조선말에 나온 한시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수도였다. 김해시에서 전해오는 금릉팔경은 옛 금관가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금릉은 이렇듯 도읍을 지칭하는 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970년대에는 군민의날과 금릉문화제가 함께 열렸다. 금릉이란 표현은 주민들 사이에서 사회단체, 체육대회, 문화행사등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다.
이 때문에 강진의 별호가 금릉이라 칭했던 것은 강진이 옛 어느 나라의 도읍이 아니였겠는가하는 추정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신라의 도읍이 금성이였듯이, 금릉은 삼국 이전에 많았던 어떤 나라의 도읍이 아니였겠느냐는 것이다.

강진사람들의 금릉(金陵)에 대한 애착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강진유림회관에는 금릉사마안(金陵司馬安)이라는 작은 책자가 전해온다. 1809년(순조 9년) 강진지역 인사들중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나 진사가 된 인사들의 명단을 적은 책이다. 당시 강진의 지명은 도강(道康)이였으나 책이름을 도강사마안이라고 하지 않고 금릉사마안이라고 지었다.

임진왜란의 명장 양건당 황대중 장군의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양건당 문집속에 임진왜란당시 강진의 유력인사들이 군대를 일으켜 국왕을 호위하고 조선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뜻을 일이킨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의 이름이 ‘금릉창의록(金陵倡義錄)’이다. 이 역시 금릉이란 별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보면 전 조선시대에 걸쳐 금릉이란 별호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중앙정부와 주고받은 공식문서에는 도강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강진에서 만든 기록이나 강진에서 통용되는 기록에는 다양하게 금릉이란 별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주민들이 가장 친근하게 생각

금릉이란 명칭은 근현대들어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오히려 더 많이 사용됐다는게 맞을 것이다. 1905년 지금의 관서재에 전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식 사립학교 이름이 금릉학교였다. 금릉학교는 1911년 강진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된다. 강진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또 1941년 설립된 중학교는 금릉중학교였고, 1962년 개교한 성요셉여고는 개교 당시 학교명칭이 성요셉 금릉여자가정고등학교였다. 성요셉금릉여자고등학교의 명칭은 2002년까지 사용되다가 성요셉여자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62년 당시 외국의 수녀회가 강진에 학교를 세우면서 굳이 금릉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당시에 금릉이란 명칭이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강진사람들의 생활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름으로 보였던 듯 싶다. 강진사람들은 이렇듯 자녀들을 가르키는 교육기관에 금릉이란 이름을 붙임으로서 그 의무를 확실히 부여하고 있다.

강진주민들의 금릉에 대한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게 금릉문화제일 것이다. 금릉문화제는 1973년 시작됐다. ‘강진군정50년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 전 주민들 대상으로 문화제 명칭을 공모했다.

그 결과 금릉으로 하자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와 문화제의 명칭을 금릉문화제로 결정했다. 초창기 명칭은 강진군민의날 및 금릉문화제였으나 1990년 이 행사를 아예 금릉문화제로 바꾸어 버렸다. 금릉문화제 행사의 의미에 대해 강진군정 50년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문림옥향 강진을 대내외에 선양하고, 탐진강 젖줄기에 오곡백과가 풍요로운 살기좋고 인심좋은 우리고장을 가꾸는 맥락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문림옥향, 좋은 인심 상징

우리 강진사람들이 금릉이란 명칭에 담고자 했던 뜻과 의미를 알 수 있는 문구다. 금릉은 강진사람들에게 문림옥향과 풍요, 좋은 인심을 상징하며 수백년 동안 내려왔던 것이다. 그럼 금릉은 왜 강진의 별호가 됐을까.

그럼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금릉(金陵)’이란 강진의 별호는 왜 사용된 것일까. 별호를 사용한 것은 고려의 시대적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고려왕건은 태생적으로 두가지 한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지방호족들과의 관계가 약하다는 것이였고, 두 번째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시급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탄생은 통일신라시대 중앙정부의 부패와 이에따른 지방호족들의 세력강화에서 비롯됐다. 왕건도 송도의 호족이였다. 이 때문에 안정적인 국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방토호세력과 연대가 필수적이였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는것도 고려왕실의 큰 과제였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동원됐던게 별호를 지정하는 것이였다. 이와관련해서는 우태연 박사가 1987년 발표한 ‘고려초 지명별호의 제정과 그 운용’이란 논문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고려는 성종 10년(991)년 전국 50여개소에 대해 별호를 제정한다. 금릉이란 강진(도강현)의 별호는 이때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기 송나라에서는 문신관료체제에 의한 군주독재가 성립되던 시기였고, 고려는 성종에 의해 중국제도의 수용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정해진 별호들이 대체적으로 송나라 군현 명칭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비슷하게 인용한 것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이 무렵 고려사회제도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었던 송나라 제도의 수용과정에서 별호의 모방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릉은 청자생산과 연관있는 듯

그렇다고 각 지역의 별호를 아무런 의미없이 중국것을 그대로 가져다 붙힌 것은 아니였다. 그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게 많았고, 행정구역 개편전 이름, 왕비가 나왔던 지역 이름, 공신의 본관등을 그대로 살려 지역토착세력을 위무하고, 공신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강진주변지역 별호를 살펴보면 영암군은 낭주(郞主)였고 보성군은 산양(山陽), 나주는 금성(錦城)이였다. 이중에서 강진의 금릉 못지 않게 지금도 별호가 사용되고 있는 곳이 영암의 낭주이다. 영암은 낭주고등학교를 비롯해 낭주중학교등 낭주란 별호를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럼 강진은 왜 금릉이란 별호를 얻었을까. 앞서 기술했듯이 금릉은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남경의 옛 이름이었다. 남경은 춘추시대 오ㆍ월ㆍ초나라 때까지 금릉으로 불리다가 다시 건강으로 바뀐 후 청나라 들어 다시 금릉으로 불리었다. 고려왕실은 강진(옛이름은 도강)의 별호를 중국의 옛 수도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앞서 설명했듯이 고려 성종임금은 별호를 지으면서 그 지역의 특성을 반영했다. 금릉은 중국 남경의 옛 이름으로 중국의 오랜 수도였다. 그럼 강진은 중국의 수도에 못지 않은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일까.

시기적으로 몇 가지를 탐색해 보자. 고려성종이 별호를 지었던 991년은 시기적으로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청자가 만들어질 때와 일치한다. 이 시기는 아직 상감청자란 최고급 청자는 나올때가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말 중국의 저장성(浙江省.절강성) 월주요쪽에서 들어와 이제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대량생산체제에 나설때이다. 고려청자는 이때부터 고려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발전했다.

전문가들의 글을 종합해 보면 강진에서 청자가 양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0세기 중후반인 광종 연간(949
~997)~성종(981~998) 연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릉은 강진의 청자생산과 큰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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