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해서 돈을 모으되 의로운 일에는 써라

병영면 낙산마을 전경이다. 병영에서 상인들이 가장 많았던 마을중의 하나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까지 가서 포목을 팔던 사람도 있었다. 외지에서 장사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아 마을에 장학금이나 효도기금을 많이 기부한 마을로 유명하다. 한일은행장 대행과 한미은행장, 전국은행연합회장을 지낸 신동혁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다음달이면 마을 동계(洞契)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을이 노령화되고, 주민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동계는 마을의 가장 큰 행사요 끊이지 않은 전통이다.

마을의 질서와 미풍양속을 지켜가고 한해의 대소사를 결정하기 위해 전해지고 있는 대동계는 마을의 최고 의결기구이다.

매년 12월 말부터 1월 초순에 열린다. 대동계는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해 결산보고, 마을계획 수립, 임원선출 등 다양한 의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 마을 대동계는 마을의 최고 축제였다.

이른 아침부터 음악을 울리고 하루종일 음식을 나누면서 한해(음력)를 마감했다. 지금은 주민수가 줄어 대동계의 의미가 퇴색됐지만 마을의 크나 큰 행사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12월이면 시작되는 마을 동계

예전에는 대동계에서 다음해 파종할 씨앗에서부터 품삯, 농기계임대료 등이 정해졌다. 또 마을에서 생긴 애경사와 울력에 불참한 주민들에게 부과하는 벌금액도 대동계를 통해 결정됐다. 대동계가 끝난 후에는 부녀자들이 정성껏 장만한 음식으로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마을을 돌며 온종일 사물놀이 등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1723년에 만들어진 낙산마을 동계안 내용이다. 강진에서 가장 빨리 만들어진 동계안중 하나로 평가된다. 마을 주민들의 공동노동과 상부상조 등 일반적인 동계내용과 함께 돈의 중요성과 근검절약의 필요성 등이 담겨 있어 상인들이 많은 마을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동계는 일반적으로 조선중기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조선중기 사족지배체제의 산물로 사족들의 향촌지배와 교화를 목적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신분제의 동요와 서민층의 성장으로 각 마을별로 독특한 형태로 발전해 기층민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촌락운영을 담당하는 조직체로 발전하게 된다.(김용덕, 조선후기의 자방자치-향청과 촌계, 1989 참조)

전통적으로 각 마을은 동계는 동계안(洞契案)이라고 해서 자체적으로 제정한 규약을 가지고 운영됐다. 일종의 내부 규칙인 셈이다. 오래된 마을 일수록 이 동계안이 가진 영향력이 막강해서 이 규칙을 따르지 않은 주민은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오래전 이야기다.

각 마을의 동계안은 그 마을의 특성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농경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마을은 소작료에 관한 것이나 농번기 품삯 등에 대한 항목이 다수 포함돼 있고, 바닷가 마을은 어촌계 운영이라든가 공동양식장 사용문제 등이 반드시 포함돼 있다.

공통사항이라면 마을의 관혼상제, 지덕증진, 산업진흥, 악폐교정 등 일반 주민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규범 등이 있다. 많은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동계안과 회의록 등은 그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동계회의록 등에는 마을 주민숫자라든가, 그해 마을에서 거둬들인 공동자금, 동계를 치르면서 지출된 예산 등이 꼼꼼히 적혀 있기 때문에 그 마을의 역사는 물론 당시 전반적인 사회상을 나타내고 있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대동계안은 전남도문화제로 지정돼 있다.

이번 인문기행을 떠날 곳은 병영면 낙산마을이다. 낙산마을은 비교적 빠른 1723년 3월에 동계를 만든 곳이다. 그러니까 18세기 들어 신분제의 동요와 서민층의 성장으로 동계가 촌락운영을 담당하는 조직체로 발전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분제의 동요의 원인은 서민층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흐름이 있었다. 서민층이 성장한 것은 기본적인 요건이 상업의 발달이었다. 대대로 농경생활에 의지하고, 땅주인과 소작농 관계에 있던 농촌의 생산관계가 상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상업자본가 들이 나와 자연스럽게 신분제가 흔들렸던 것이다.

상업문화 전하는 낙산마을 동계안

목포에서 기물장사를 해서 크게 성공해 마을에 많은 희사를 했던 박영회 선생의 공적비가 서 있다.
병영 낙산마을은 그 시대 그러한 상황의 중심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찍이 상업이 발달했던 병영상인의 마을이다. 마을사람들이 포목을 만들어 봇짐에 짊어지고 전국으로 팔러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에게 뒤질 세라 상인이 됐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나왔다. 부자들도 나왔다.

훗날 이야기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기차를 타고 만주까지 가서 포목을 팔고 오기도 했다. 이 마을 출신 박영회 사장은 해방 후 목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물상회를 운영했던 상인으로 그의 수하에서 상업을 배웠던 병영출신 상인들이 독립해 광주와 전남 시장 곳곳에서 성공을 이루었다.      

1723년 작성된 낙산마을의 동계안(洞契案)은 이러한 시대상과 마을 주민들의 재물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목이 나온다. 낙산마을 동계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절약을 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모으되 수입과 지출을 맞추고 쓸데 쓰고 절약할 것은 절약해서 훗날을 대비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여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요 의로운 일에는 마음과 재물로 도울 줄 알아야 절약할 줄 알고 바르게 사용할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을 합하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은 계보다 좋은 것이 없고 살아가는데 언제나 필요한 것은 돈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  (강진군마을사 병영면편, 1991 참조)

보통 동계란 마을주민들의 단결과 협력을 위해 만든 계모임으로 조선시대의 동계안은 앞서 얘기했듯이 권선징악차원에서 농촌경제의 안정과 동계원의 통제를 통한 상하 신분질서의 확립, 동네 부역의 조정, 애경사의 부조, 필요한 경우 노동력의 동원 방법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낙산마을 동계안의 경우 재물의 개념, 절약의 의미, 절약의 방법, 재산을 모으는 의미 등이 분명히 나타나 있어 18세기 병상(兵商) 사이에 재물에 대한 개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낙산마을 동계안은 이로부터 48년 후인 1771년에는 일종의 보완판이 나오는데 다음 내용이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절약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늘리는 일을 더욱 잘되게 하여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게 하되 꼭 빌려줄 사람에게는 빌려주고 때가되면 거두어 들였다가 긴급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가 뚜렷해져서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며, 이롭게 사용되어야 절약하는 습관이 길들여지게 될 것이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모았다가 나누어주고 받았다가 빌려주는 것이니 하나는 모두가 힘을 써서 잘 지킨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서로가 언짢게 지내는 것을 풀어 버리자는 것이다”

낙산마을 동계안을 통해 파악되는 병영상인들의 재물개념은 첫째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계안에는 ‘살아가는데 언제나 필요한 것은 재물이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절약을 해야 한다’며 재물의 중요성과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절약해서 훗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재물을 모으는 것은 절약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라며 재물을 모으는 것과 절약하는 것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고 있는 것도 독특한 재물개념으로 보인다. 

고향마을 동계 관심가지면 좋을 듯

두 번째는 절약을 해서 돈을 모으되 의로운 일에는 돈을 쓰라고 권장하고 있다. 동계안에는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모으되 수입과 지출을 맞추고 쓸데 써야 한다. 의로운 일에는 마음과 재물로 도울 줄 알아야 절약할 줄 알고 바르게 사용할 줄 알게 될 것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모았다가 나누어주고 받았다가 빌려주는 것”이라며 재물을 모으는 것은 개인의 축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나누어 주고 이를 받아서 다시 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돈을 개인의 축재 개념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사람과 공유한다는 공적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 정리해 보면 병영상인들에게 돈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살아가는데 중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절약을 기본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중요한 돈을 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회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영상인에게 상업 활동은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행위이자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수단이었다.

곧 마을 동계가 시작된다. 연중 가장 큰 행사다. 마을에 노인들이 많다 보니 동계가 예전처럼 활기를 띨 리가 없다. 출향인들이나 또는 읍내에 사는 사람들이 고향마을의 동계를 챙겨보는 것도 좋을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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