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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 19. 강진야당 60년 산 증인 박병춘(朴秉春)<상>“메마른 대지 위에 싹이 피었네… 양위원장! 특별 관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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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7  20: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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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0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지명대회 후 조병옥 박사와 장면 부통령이 조우하고 있다. 박병춘 선생은 22세의 나이에 조병욱 박사 앞에서 혈서를 쓰며 정치에 입문했다. <인터넷 캡쳐>
필자가 박병춘 선생을 본 것은 4. 19 이후 강진 민주당의 중심이요 야당인사들의 결집지인 박윤근 가(家)의 장남이요 평생 죽마고우인 박성웅(朴聖雄, 건설업)과 함께 민주당 선거유세용 지프를 타고 도암면에 함께 갔을 때부터였다.

당시 박병춘은 20대 초반의 정치입문생이자, 야당 실력자들의 경호역 내지는 비서역을 맡고 있던 야당청년이었다.
 
   
 2대 강진군 민의원을 지낸 양병일 의원
내가 박병춘에 대해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강진을 비롯한 한국사회가 돈이 많거나, 출세를 했거나, 학력이 높거나, 집안내력이 벌쭉하거나 해야 행세하는 곳이지만, 올해 83세인 인간 박병춘은 이 네가지 항목에 아무군데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박병춘의 단 한가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야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60여년 이상을 시종일관 완주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정치사상의 수준이나 지역발전에 대한 공과에 대해서 잘 아는 바가 없다.
야당의 선명도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 필자와도 결이 좀 다르다. 박병춘은 한마디로 보수적 민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아직도 조중동 신문 정도의 평론을 선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인간 박병춘은 불의한 권력에 기웃거리지 않고, 크게 부정한 이권에 개입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는 것 같고, 자기 나름대로의 양심과 신념과 인생관을 가지고 자유당, 민주당, 군사독재, 민주화과정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지역 정치인이란 이름으로 완주했다는 점에서 인간거목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야당생활과 더불어 사냥꾼(獵師)으로서 낚시꾼(釣士)으로서 프로급이다. 가정을 이끌만한 경제사업도 원만히 해서 처자식도 잘 건사하고 가정도 잘 꾸려낸 성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본다.

요즈음 선배 박병춘과 대화를 해보면 참으로 정신도 몸도 건강하다. 필자는 인간 박병춘의 야당 60년을 이야기할 때 부수적으로 강진의 정치사와 생활사가 실타래가 풀리듯이 풀려나오는 소소한 재미를 보면서 출향인 자유기고가로서 박병춘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지면을 빌어서 카나다에 거주하는 중앙초 1년 선배 김현익이 졸고인《강진극장사》에 애정을 보내주시고, 김영랑의 학력을 배제학당이 아니라 휘문의숙으로 바로 지적해 주셔서 감사의 마음을 보내 드린다. 김현익의 친구 손승원은 강진호텔에 토벌대가 주둔해 있을 실탄도 주었고, 호데루에 늘상 올라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독재속에서 청년민주투사 싹이나오다.

   
박병춘 선생
1958년은 자유당 이승만 독재가 위세를 떨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의 민주주의 지도자로 온 국민적 기대를 받던 민주당최고위원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이 광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은 강진 2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변호사 양병일(梁炳日)이었다.

이 사실은 당시 유수(有數)한 지역신문이었던 호남일보에 연일 보도되었다. 박병춘은 당시 호남신문(사장, 鷺山 李殷相)을 구독하고 있었다. 호남신문은 1950년대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의 유수한 일간지였다.  

22세의 강진출신 열혈청년 박병춘은 광주에 올라왔다. 단 한가지 이유는 이 나라 최고의 정치인 조병옥을 만나야겠다는 일념(一念)이었다. 나아가서는 최고위원 조병옥을 만나므로 자신의 정치참여의 명분을 얻고자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조병옥 일행은 동명동 동명호텔(現 동구노인복지회관터)에서 묵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서자 “저는 유석 조병옥 박사님을 면담하러 왔습니다” 박병춘은 비서진에게 야무진 목소리로 민주당최고위원 면담신청을 했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위아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대뜸 “이곳은 애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박병춘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박사님을 꼭 만나뵈야겠다고 우겼다.

경호원들에 의해 도로변까지 쫓겨갔다가 기어코 다시 호텔로 들어갔다. 박병춘은 호텔 방에서 회의하는 소리를 로비에서 들었다. 그렇다면 내 소리도 들릴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조박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라고 외치자, 결국 안에서 바깥 상황을 보고받은 후, 비서가 “들여보내라”는 조박사의 전갈을 가지고 나왔다.

조병옥을 알아본 박병춘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 절부터 했다.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왜광목(표백된 廣木, 무명베천) 한 조각을 꺼내더니 바닥에 펴놓고, 넷째 손가락을 이빨새에 넣더니 콱 깨물었다. 선혈이 흰천에 뚝뚝 떨어졌다. 망설임없이《구국투쟁》《민주당지지》라고 썼다.

조병옥은 갑작스런 일이 목전에서 벌어지자 놀라서 “의무관있는가! 속히 처치해주라!”고 지시했다. 조병옥은 박병춘에게 물었다. “청년은 어디서 왔는가?” “강진에서 왔습니다” 조병옥은 “강진이라면 양병일 위원장 지역구가 아닌가?” 이어서 “메마른 대지 위에 민주주의 새 싹이 피었네, 양위원장! 특별관리하세요” 당부했다. 

불과 2년 전인 제 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였던 혜공 신익희(申翼熙)는 이승만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세우고자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선거유세전을 펼치다가 1956년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갑작스런 해공의 부음을 들은 야당인사들과 뜻있는 국민들은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신익희의 뒤를 이어받아 한국정통야당의 지도자로 부상한 조병옥은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꺼져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씨를 살릴 수 있는 한 청년의 애국적 결단을 광주동명호텔에서 목도하고서 감격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60년 대통령 선거부터 요주의 인물

박병춘은 1938년 박귀진의 장남으로 평동에서 출생했다. 선친 박귀진은 강진 창제의원(昌濟醫院長, 李昌敎) 조수로 장기간 근무하다가 한지의사(限地醫師) 시험에 합격하여 제주도 한림에서 개업했다. 유년기를 잠깐 제주도에 지냈으나 제반 환경이 맞지 않아 모친과 함께 강진으로 돌아왔다.

선친은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1944-5년 무렵 선편으로 강진으로 돌아오다 타고오던 배가 불시에 미군 B-29의 폭격을 받아 폭침되므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어머니마저 병고(病苦)로 세상을 떠나자 천애고아(天涯孤兒) 신세가 되버린 것이다.

박병춘은 당시 남성리에서 시계포(時計鋪)를 운영하던 외삼촌 박귀진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외삼촌 박귀진은 시계수리, 조립 솜씨가 뛰어났다.

강진에 어지간한 시계공들은 박귀진의 문하를 거쳐나갔다는 것이다. 외삼촌은 중앙초등과 금릉중학교까지 보내주었다.

다시 강진농고로 진학시키려 했으나, 박병춘은 외숙에게 더 이상 부담을 안드리려고 극구 사양했다. 이후로는 내 길은 내가 개척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이후 해양경찰에 지원하려고 용댕이(용당, 당시 목포가는 선창)에서 배를 기다리다 외삼촌에게 붙들려 온 적도 있었다. 

 박병춘은 광주 동명호텔 혈서사건 이후, 양병환이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라고 해서 그의 사랑채에서 8-9년을 지냈다. 양병환은 민주당군당위원장 양병일의 동생이었다. 여기가 바로 영랑 김윤식의 생가였다.

1960년에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급서(急逝)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당선은 거의 확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느냐가 자유당이 목표하는 최대의 관심이었다.

금권, 관권, 흑색선전, 폭력이 난무했고, 3-5인조라는 희한한 부정선거 방식이 동원된 최악의 3․15부정선거를 앞둔 칠흑같은 시기였다.

강진경찰서 사찰계에서는 박병춘을 가장 주목했다. 항상 사찰계(정보과) 직원들에게 미행당했다. 교촌리에 있는 향교(鄕校)에 피신하여 있었던 때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자유당의 정적인 민주당과 요인들을 수행하고 보좌하는 행동대장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배 대상 1호가 박병춘이었다. 강진경찰서 사찰계 직원들은 박병춘을 봐도 걱정, 안보아도 걱정이었다. 정보업무란 요주의 인물에 대해 부단히 상부에 첩보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박사· 자유기고가 ·출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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