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녁 돈 내고 술먹은 사람은 나하고 김현민씨 밖에 없었니라’

부정선거 옹호하는 경찰서장 뺨을 때리다
 

김현민 선생(제일 오른쪽 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어느날 막내아들 도헌군을 안고 자신이 운영하는 강진호텔 정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도헌씨는 훗날 국민건강보험공단 강진지부장을 지냈다. <사진=후손 김도헌 선생 제공>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되었던 정부통령 선거는 그 의미가 막중했다. 자유당 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적인 정부를 세우느냐 다시 자유당 독재로 회귀하느냐 하는 기로에 있었던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었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 민생고가 심해진데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자유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두 차례에 걸친 무리한 개헌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하는 당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각종 원조금으로는 사욕(私慾)을 채우기에 바빴다. 검은 돈이 너무나 흔했다. 모든 것은 돈과 권력이 지배했다. 이승만에게는 고집은 있었지만 철학이 없었다. 신념이 흔들리는 지도자 주변에는 간신배가 들끓게 마련이다.

이 당시 강진의 정치지형은 어떠했을까? 강진에는 제 1공화국의 집권당으로 등장했던 자유당(1951년 12월 23일 창당)은 여당으로서 여느 지구당이나 마찬가지로 이승만 독재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당시 선거를〈고무신 선거〉라고 불렀다. 자유당에서는 가가호호에 고무신 선심공세를 했던 것이었다. 당시 강진국회의원은 제4대 국회의원인 무소속 김향수(아남산업)였다. 자유당 군당 위원장은 3대 국회의원이었던 변호사 출신 김성호였다. 

그러나 야당은 달랐다. 강진에는 당시 양병일(梁炳日), 김현민(金炫玟), 임언수, 박윤근(朴潤根), 황호석(黃鎬錫), 오정원, 김영, 박한주와 같은 뿌리깊은 야당인사와 박병춘, 오석보와 같은 청년야당 인사 등이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당사무실은 남성리 전 호정다방 자리였던 김현민의 이층집 자택〈산해당(山海堂)〉에 2층에 있었다. 강진민주당사무소 간판도 이층 입구에 붙어 있었다. 회의는 주로 아래층 안방에서 모여 중요안건을 숙의했다.

이것은 필자의 강진중앙초 동창이면서 김현민 선생의 2남인 김도헌(金度憲, 국민건강보험공단 전 지사장)의 증언이다. 자유당의 관권선거 개입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당시 강진경찰서장은 민주당원들이 보는 앞에서 김현민에게 “영감님! 협조해 주십시오” “영감님은 가만히만 계셔주십시요” “그렇게만 하시면 현찰로 ○○만환을 드리겠습니다” “기관장 자리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이 때 김현민은 분기가 충천하여 “네가 나를 무엇으로 보고 그 따위 수작을 부리느냐”고 소리치면서 경찰서장의 귓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대단한 용기였다. 주위에 있던 민주당원들도 동지들도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었다.

민주의식을 겸한 풍류객이었다

김현민(1906-1969년)은 강진읍 서문안 전라관찰사 비장(비서실장)을 지낸 아전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진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배제학교(培材學校)를 졸업했다. 영랑 김윤식도 배제학교 출신이었다. 영랑은 김현민의 9촌당숙(再再堂叔)이었다.

김현민은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가 처가가 작천면 야흥리 야동마을인데 이 근동에서는 이름있는 재산가로서 사위의 활동을 후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처남들은 두 명이 일본 와세다대(早稻田大, 동경소재)에 다녔다고 한다. 강진에는 강진 3. 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금릉학교를 설립했던 김안식을 비롯해서 와세다대 출신이 여럿이 있었다.

1954년 해공 신익희 선생(앞줄 가운데 모자쓴 사람)이 강진을 방문해 영랑생가에서 기념촬령을 했다. 김현민 선생은 보이지 않지만 당시 국회의원을 지냈던 양병일(해공의 왼쪽)씨의 동생 양병환(오른쪽 두 번째 줄)씨등이 보인다. 오른쪽 제일 앞이 고 김영 강진번영회장이다.<강진일보 자료사진>
김현민은 해방 후 호데루(호텔, hotel)를 경영했다. 강진 사람들은 한동안 이 건물을 일본식 발음인〈호데루〉로 불렀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일제강점기에 조선 부호 김충식이 일본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1916-19년재임)을 영접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이 하세가와 총독은 3. 1운동 당시 만세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악명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후 해방과 함께 김현민 선생이 호텔을 인수한 것이다. 이층 목조건물인데 서쪽으로 터진 ‘ㄷ’자 형(型) 건물이었다. 건물 한 가운데는 중정(中庭)이 있었고 한 가운데는 작은 연못이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었다.

방은 20여개 이상 있었고, 당시 호텔 이름은 쓰루야(鶴)였다.(박상우 선생 증언) 이 호데루의 크기로 말하면 6. 25 당시 국군 토벌군 1개 연대가 상당한 기간동안 숙식을 할 정도였으며, 연대장이 쓰고 두고간 침대가 한동안 남아 있었다. 쓰루야 호텔은 나중에 강진호텔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려서 이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보면 계단 난간이 정교하게 목각이 된 계단이 있었고, 긴 복도를 따라 다다미 방이 주욱 붙어 있었다. 호데루 마당 전면 왼편에 가로 5~6m, 세로 7~8m정도, 깊이는 3~4m 정도나 되는 직육면체 저수조가 있었다.

어려서 지나가다 보면 들여다 보기도 무서운 커다란 물탱크에 파란 녹조가 낀 물이 가득히 차 있었다. 아마 방화용수로서 일제가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짐작한다. 후에 이 저수조는 매립되어 초등학교 동창 노주섭의 선친 노중진이 상가주택을 지어 풍진상회(그릇장사)를 경영했었다.

이 호데루는 김현민의 부인이 이다바(ぃたば, 調理師)를 데리고 운영했다. 김현민의 성품은 호방하고 풍류객이어서 부인이 사업해서 벌어놓은 돈을 가지고 서울인지 어딘지는 몰라도 주유천하하고 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돌아왔다.

김현민은 내 선친 김봉두(金奉斗)보다 10여년 연상인데, 나의 선친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강진 요정가에서 ‘이녁 돈내고 술먹은 사람은 나하고 김현민씨 밖에 없었니라’ 내 선친은 평생 사업해서 조금 벌었다 싶으면 풍류와 기마에(きまえ, 滑水한 기질, 厚한 기질)로 살다가 처자식을 퍽이나 고생시킨 인물이란 것을 80-90대 이상 연세의 재향, 출향강진분들은 짐작할 것이다.

아무튼 김현민은 해방정국에서 전국을 다니면서 나라의 장래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서 애국인사, 정객들과 교류하면서 나라의 운명에 관해 의견도 주고 받았을 것이고, 또한 넉넉한 재력으로 풍류도 즐겼음직도 한 것이다.

그 활수(滑水)한 기질로 8도 기생은 다 섭렵하고 다녔다는 풍문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남편의 인품과 기질을 아는 부인(婦人)은 일체 불평없이 부군의 뒷바라지를 했던 당시 조선식 양가의 법도를 따르는 남편을 하늘로 아는 순종형 현모양처였던 것이다.

연식정구 실력이 선수급

또한 김현민은 스포츠맨이었다. 강진에는 일찍이 연식정구(軟式庭球)가 보급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랑 김윤식, 독봉 이선웅, 황호신(강진약국) 등 정구선수급들이 많았다. 특히 김현민 가(家) 부자간(父子間)은 선수급이었다.
 
김영배(金永培, 중앙병원장, 서중26회 1951년졸)는 광주서중 시절 전국대회에서 수차레 우승을 한 선수였다. 이 무렵 광주서중은 스포츠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광주서중 야구선수 김양중(金洋中)은 6. 25 직전 1949년 제4회 청룡기 결승전에서 당대의 강팀 경남중을 상대로 9회말 2사 2루에서 중전 적시타를 치므로 11회 연장 역전승을 거두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므로 야구사상 일약 스타가 되었다.

연식정구에서는 김영배가 광주서중 전위(前衛)였고, 서인교가 후위(後衛)를 맡아 한 조(組)를 이뤄 전국대회에 우승을 해냈다.

두 사람은 당대에 스타급 선수들이었던 것이다. 6. 25 전쟁이 치열했을 당시 서인교는 좌익학생으로서 지리산에 입산(入山)했다. 국군 토벌대가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포위한 가운데 절 안에 숨어있는 빨치산들을 저격하려고 ‘사격준비’ 명령을 내렸다. 숨어있던 서인교는 이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 때 서인교가 결단을 하고 손을 들고 ‘나 광주서중 정구선수 서인교 나갑니다’라고 외치자, 정구선수로 널리 알려진 서인교를 알아본 토벌대장이 ‘오! 서인교 나와라’ 즉각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생사를 넘나드는 극적(劇的)인 순간이었다. 이 사실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이렇게 강진의 ‘康津人間劇場史’ 써 내려가다가 보면 강진을 넘어선 광주-전남과 한국사의 잊을 수 없는 극적인 장면들이 나오곤 한다.  

독재시대의 의인(義人)이었다
 
혜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4-1956년)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부부장 등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민주당 최고위원 및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는 대통령 출마의 꿈을 갖고 전국에 유세를 다니던 중, 강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해공 신익희를 방문을 맞이한 강진의 김현민, 박윤근, 임원수, 황호석, 황호신, 오정원, 김필수 등 야당인사들과 그를 흠모하는 강진군민들은 평동 강진중앙초등학교 앞에서 동성리 박윤근집 앞까지 해공 신익희를 옹위(擁衛)하면서 행진을 하였다.

그는 195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1956년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急逝)하였다. 김현민 선생은 며칠을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4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이, 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李起鵬)이 출마했다. 전국적으로 부정선거가 기획됐다. 이는 강진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강진에서 야당의 선명성과 상징성이 높은 김현민은 장터 함석집에서 맞춘 스피커를 사용하여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면서 가두방송에 나섰다.

비가 오는 날에도 시가지와 장터를 다니면서 자유당의 독재를 꾸짖고 부정선거를 규탄하였다. 목이 쉴 때로 쉬었지만, 그의 독재타도에 대한 열망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감동을 주었다. 필자도 어려서 강진시장통을 다니면서 독재타도를 외치던 야당투사요 애국지사인 김현민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이요 정의필승(正義必勝)이었다. 4. 19 의거로 인한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의해 독재자 이승만은 하와이로 쫒겨가고 장면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김현민은 민주당 신파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이후, 이렇다할 선출직이나 공직에 진출했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항상 야당의 구심점에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반증하는가? 김현민의 삶이 자리나 명예나 사익을 추구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김현민이 1956년 민주당 소속으로 읍의원에 당선되어 활약한 내용은 시장확장추진사업이었고, 읍영목욕탕설치사업이었다. 그는 강진읍의회 부의장으로서 읍민들의 복지를 위해서 실제적인 활동에 전력투구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1960년에 제 3차 강진읍의원 명단에서 볼 수 있는데, 1961년 5. 16 혁명으로 인하여 그 재임기간이 극히 짧았을 것으로 사료되는 바이다.

강진의 한복판인 호데루를 경영했고, 풍류객으로 팔도를 주유천하했다. 멋진 삶을 살았다. 민주주의 수립을 위해 야당투사로서, 시장통에서 자유당 타도를 외치고 회색 두루마기를 펄럭이면서 압구재를 넘어가던 의연한 우국지사의 풍모는 강진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는 강진은 물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정의로운 삶의 역정을 살았던 전정한 양심인 김현민은 강진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의인의 삶을 살다가 갔다고 그 분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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