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 남포로 오던 한 젊은이의 리더십

청산도 동쪽 해안의 깎아지를 듯한 암벽은 300여년 전 장한철 일행이 파도에 밀려 상륙을 시도하면서 강진읍 남포마을로 오던 사람들이 희생됐던 곳이다. 뒤쪽으로 멀리 보이는 섬이 여서도다.
조선시대(1770년)에 강진 남당포~ 제주도 뱃길사이에서 일어났던 대형 해난사고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해난사고 기록에 한 젊은 선비의 리더십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1770년 12월 25일 제주의 장한철이란 사람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제주항에서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마을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완도 소안도 인근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서쪽으로 밀려 표류하기 시작했다.

제주 애월읍서 남포행 뱃길 시작

8일 동안 일본으로 표류했다가 다시 떠밀려 온 장한철 일행은 보길도와 소안도 인근에 도착했으나 “이제 죽었구나”를 연발한다. 한 선원은 장한철에게 소리친다. “저 해로는 모두 난서(亂嶼)·험안(險岸)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은 날도 배가 부서져 빠집니다. 그곳의 바윗돌은 마치 칼날같고 파도가 몹시 험악합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바다를 뒤집고 성난파도는 하늘에 솟구치는데, 어떻게 죽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남풍이 맹렬히 불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럽게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는 큰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배 밑으로는 물이 새어들고 배 위엔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뱃사람들은 배 안에 고인 물이 허리까지 차 올랐지만 물을 퍼내려고 하지 않고 자포자기로 있었다. 

제주박물관이 소장중인 장한철의 표해록과 내용이다.
장한철은 선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함부로 명령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장한철은 이제 33세로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처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의 상황이 하도 혼란에 빠지자 한동안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장한철은 뱃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볼 때 서해에 외연도라는 섬이 있었는데 동쪽 소안도와의 거리는 1천300리가 된다고 하더라. 이 배의 속도가 나는 듯 빠르니 내가 생각하긴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외연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이 섬은 곧 탐라가 원나라에 조공할 때 수역(水驛)을 설치했던 곳이다. 우리들에게 모름지기 살아날 길이 있는데 어찌 하늘인들 돕지 않을소냐. 더욱이 이 배는 새로 만들어 튼튼하니 아무 근심할 필요가 없다”

살길이 있다는 말을 들은 뱃사람들은 생기가 돌아 배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장한철의 말 한마디가 자신감과 함께 큰 희망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한철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장한철이 뱃사람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야화에서 얻어 들은 이야기였다.

“희망 가지면 살 수 있다”

외연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배는 이미 뱃줄과 삿대도 다 잃어버려 바람부는대로 떠돌아 다니고 있는 상태여서 목적지를 향해 갈리는 만무한 상태였다. 장한철은 살아볼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뱃사람들을 이 이야기로 속여 위로함으로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한철의 말을 들은 뱃사람들은 그 후로 배에서 할 일을 명령만 하면 잘 따르게 됐다. 장한철은 이후에도 바람의 속력이나 배의 방향에 따라 여러차례 뱃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속인말을 하며 뱃사람들을 안심시키곤 했다.

장한철은 이처럼 백가지 수단으로 뱃사람들을 속여 위안을 준 것은 선원들이 전력을 다해서 침수를 막아 배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 사람들이 울고불고 하는 몰골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마음이 타도록 애쓰며 온 정신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장한철이 표류기간 동안 거쳤던 지역이다. 1770년 12월 25일 제주도 애월읍에서 강진읍 남포마을을 향해 출발해 하루 정도면 도착할 거리를 중간에 태풍을 만나 표류해 20일만에 남포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뱃사람들은 장한철의 선의의 의미에 속았지만 살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조바심을 갖지 않게 되었고, 배에 물이 차면 사력을 다해 물을 퍼낼 수 있는 힘이 샘솟았다. 장한철이 뱃사람들을 속여 안정을 시키고 삶에 희망을 준 방법은 오늘날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늘날에는 뱃사람들에게 있는 상황을 그대로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장한철의 방법은 불가피하면서도 그 시대와 맞는 적절했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한다. 한편으로 장한철은 사태의 위급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괴로워 했다. 겉으로는 태연한척하며 답답함을 풀어보려 했으나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해 오자 물을 자주 마셨다.

장한철 일행이 바다위에서 최대 난관을 만난 것은 표류 13일 만이었다. 함께 살아서 육지에 도착하기 위한 장한철의 노력은 더욱 집요하게 진행된다. 유구쪽까지 흘러갔던 배가 다시 흑산도쪽으로 밀려왔을 때 태풍을 만났다. ‘큰 물결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고 회오리 바람은 바다를 체질하듯 들까불어 댄다.

뱃사람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죽음을 기다릴 지경이다’ 속장(束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공도 죽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사공까지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렸다.

장한철은 급히 사공에게 호산도에서 점을 쳤는데 먼저 흉하고 길할 괘가 나왔다며 지금 상황이 흉이니 반드시 길할 상황이 온다며 목숨을 보전하라고 소리쳤다. 물론 호산도에서 점을 쳤다는 장한철의 말 또한 사공에게 용기를 주기위한 언사였다.

장한철 일행이 탄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산도 인근으로 표착했다. 스물 아홉명 중에 두명이 죽었으니 스물일곱이 탑승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뱃사람들 중에 섬에 상륙한 사람은 여덟사람에 불과했다. 나머지 19명은 배에서 내리는 과정에서 파도에 휩쓸리거나 해안가에서 마을로 가는 길을 걷다가 낭떨어지로 떨어져 죽었다. 기록으로 남은 사건중 조선시대 최악의 표류사건이었다.

청산도에 도착해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장한철 일행은 어느날 마을 당집에 들리게 된다. 장한철은 그곳에서 자신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소복입은 여인을 발견한다. 무녀의 딸이었다. 그날밤 장한철은 이 소복입은 과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평론가들은 이 부분이 해양문학이 갖는 설화적 요소가 깊게 베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한철 표해록이 갖는 백미는 바로 이 대목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다에서 겪었던 처절함을 실감나게 설명하면서도 한여인과의 로맨스를 아름답게 삽입한 장한철의 표해록이야 말로 청산도에서 다시 살아나야 할 금자탑이다.

장한철은 처음 태풍을 만나 표류를 시작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행동하게 한 과정을 회고했다. ‘풍랑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습성이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배가 표류하는 동안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저들은 나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슬퍼하며 마치 주인을 섬기 듯 하였으니 그것은 내가 덕이 있어서가 아니였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므로 죽을 때가 되어 그 말이 착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은 평소의 수양과 습관의 차이 때문이다’  장한철은 또 표해록 말미에 나그네와 대화형식을 빌어 표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바다를 표류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출렁이는 파도와 사나운 고기떼 뿐이었습니다. 나는 이미 이같은 곤경을 겪은 탓에 가는 곳이 어디이든 내 집처럼 편하지 않은 곳이 없고, 밟는 곳이 어디이든 모두 평탄한 길과 잔잔한 물결 아님이 없으니...<중략>... 잠시라도 바다에 표류할 때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천지간에 어떤 사물도 나의 즐거움 아닌 것이 없고, 어떤 일도 나의 기쁨이 아닌 것 없습니다. 내가 표류한 것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이로부터 또한 지극한 즐거움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남포에 도착해 한양으로 갔으나

장한철은 표류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었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게된 계기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장한철 일행은 1월 14일 고금도와 마량, 칠량을 거쳐 다음날 남당포에 도착했다. 장한철이 남당포의 객점에서 쉬고 있을 때 옆방에서 “바람만 좋으면 소안도(所安島)에 배를 댈 것 없이 곧장 제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된다. 제주사람들이었다.

장한철은 함께 있던 동행인에게 말한다. “육지에서 제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배를 몰아 소안도로 들어가서 거기서 순풍을 기다려 제주로 가는데 저 사람들이 소안도에 들리지 않고 제주도로 곧장 가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고향이 간절히 그리운 것 같다”고 했다.
 
잠시 후 서로 제주사람들인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장한철 일행에게 장삿일로 육지에 나왔다가 물건을 모두 팔고 제주로 돌아가려고 순풍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장한철 일행과 상인들의 대화는 당시의 남당포 역할을 몇 가지 전해준다. 당시에 제주도에서 배를 직접 가지고 남당포로 나와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남당포에서 출발하는 배는 중간의 소안도에서 좋은 바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장한철은 그 와중에서도 남당포에서 김창현이란 사람과 함께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가고, 나머지 6명은 다음날 남당포에서 상인들의 배를 얻어타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장한철은 결국 과거에 낙방하고 남포를 통해 고향 제주 애월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유명한 ‘장한철의 표해록’을 적어 후손들에게 기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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