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마을 머리구잔등 일본식 무덤의 비밀은

강진읍 장동마을 서쪽 들판에 있는 전방후원분의 모습이다. 주민들은 이곳을 머구리 잔등이라고 부른다. 머구리는 개구리의 옛 이름이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식 무덤이여서 그 성격을 두고 여러 가지 설들이 많지만, 이 일대가 오래전 국제교류가 많은 지점이었다는 것은 확실시 되고 있다.
강진읍 영파리 장동마을 서쪽에는 뒷산에서 들판쪽으로 이어진 길다란 산자락이 있다. 주민들은 이 산이 뱀을 닯았다고 해서 뱀산이라고 부른다. 뱀산의 끝쪽은 마치 뱀의 대가리 같다.

뱀산이 끝나는 지점 논 한가운데에 영락없이 개구리를 닮은 봉우리가 하나 있다. 주민들은 이 곳을 머구리잔등이라고 한다. 머구리는 개구리의 옛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해 노리고 있는 형상으로 해석한다. 풍요를 상징하는 의미도 가진다. 머구리잔등은 동서로 길게 누워 있다.

앞쪽이 잘록한 머리모양이고 뒤쪽으로 가면서 둥그런 원 몸집 모양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개구리 같기도 하고 자라가 목을 내놓고 있는 형상 같기도 하다.
 
더 자세히 이곳을 들여다 보면 우리 전통악기인 장고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인터넷 구글지도에서 보면 열쇠모양도 느껴진다.

이 머구리 잔등이 바로 영산강유역에서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전방후원분, 다시말해 6세기에 축조된 고대 무덤이다.

머리구 잔등의 비밀

전방후원분속에 들어 있는 일본식 전통 토기인 하니와의 모습이다. 하니와는 대체적으로 무덤 둘레에 둥그렇게 매장돼 있다. 이미 발굴작업을 진행한 영암의 전례를 두고 볼 때 하니와 외에는 다른 특별한 것은 나오지는 않았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수수께기를 가득 품고 있다. 이 무덤은 전일본의 고분시대(4-6C경)에 성행했던 전형적인 무덤양식이다. 그동안 전방후원분은 영암과 함평, 광주, 해남 등 영산강 유역에서만 13기가 확인됐다.
 
해남 북평면의 장고봉도 그런 무덤이다. 강진에서는 현재까지 딱 하나 전방후원분이 발견됐다. 이 무덤을 파면 100% 하니와란 고대 일본토기가 나온다. 이 때문에 한일 역사학계가 주먹질에 가까운 논쟁을 펴왔다.
 
일본사람들은 이를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라고 우겼다. 한국 학자들의 다양한 반격이 있었다.

최근에는 백제시대에 일본에서 건너온 용병의 무덤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같은 무덤형태가 한반도 남부의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구리잔등은 논 한가운데 있었다. 이 곳이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은 한눈에 확인되고 있다. 잔등윗쪽에는 소나무가 여러그루 자라고 있었지만 멀리서 소나무밑으로 보이는 선을 보면 뒷쪽이 높고 앞쪽이 낮은 분명한 전방후원분이다.

전방후원분을 단순화한 모형. 열쇠구멍 모양이다.
또 뒤쪽이 둥그렇고 앞쪽이 4각형으로 튀어나온 전형적인 열쇠모양을 하고 있다. 6세기초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형태였다. 고분은 농사를 짓느라 조금씩 긁어내려 동쪽이 조금 훼손돼 있었다. 또 원형부의 경우 중앙은 일부 함몰되어 있으며 북쪽은 유실이 비교적 심하여 석재가 다량 노출되어 있다.

민족문화유산연구원과 문화재청이 임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고분의 규모는 잔존 전체 길이는 67m이며, 원형부 직경은 38m, 원형부 높이는 7m 정도이다. 방형부는 유실이 심하여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현재 규모는 연결부 너비 20m, 방형부 길이 27m이다.

고분의 정상부는 방형부와 원형부에서 2~5m의 평탄면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67m에 이르는 거대한 고분이 장동마을에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영암 자라봉 고분보다는 두배는 큰 고분이다.

영파리 일대는 고대 해양기지

전방후원분은 그동안 고창 칠암리, 담양 고성리, 성월리, 함평 장고산 신덕 표산, 광주 월계동, 쌍암동 명화동, 영암 자라봉, 해남 용두리 조산 장고산 등에서 발견됐다.
전방후원분이 있는 곳은 강진읍 영파리 군내버스 승강장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오래전 이곳은 바닷물이 닿는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13기전방후원분은 모두 강변이나 바닷가, 다시말해 배가 들어오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배가 들어오지 못한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모두 배가 들어 왔던 곳이었다.

강진읍 영파리 일대 장동, 차경, 팔영마을도 해양문화권이었다. 언제까지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장동마을앞 깊숙히 바닷물이 들어왔다. 지금은 동쪽으로 큰 임천저수지가 버티고 있어 어떻게 바닷물이 들어왔을까 싶지만 그땐 그랬다고 한다.

주변에는 바다와 관련된 지명이 수두룩하다. 장동마을앞에는 도루메산이라고 해서 작은 잔등산이 있다. 배가 돌아서 나간 곳이라는 뜻이다. 강진만으로 들어온 배는 서쪽끝 이곳 장동마을까지 깊숙히 들어와서 도루메산을 돌아 다시 나갔던 것이다.

북쪽에는 강두머리가 있다. 배가 닿았던 곳이었다. 또 지금의 차경마을 인근 잔등은 도선등이라 불리었고, 도선등의 건너편을 돌임이라고 했다. 이곳 역시 배가 돌아나간 지역이었다. 마을주민들은 이 일대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시기를 고려시대쯤으로 보았다.

팔영마을 인근에는 큰 고인돌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주변 바다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강진만 바닷물이 장동마을앞까지 출렁인 것을 상상해 보면 강진만에는 탐진강과 반대편 영파리쪽에 커다른 내수면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만덕산이 막아주기 때문에 태풍이 불어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광활하게 형성된 갯뻘에서는 해산물이 풍부하게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뒷산을 넘으면 바로 성전이나 해남으로 연결돼 상품이 유통되기에 적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부터 집단취락구역이 들어서고 부족국가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많은 곳이다. 이 세력들은 바다를 통해 활발한 대외교류를 했을 것이다. 또 일본이나 중국등 바다바깥 나라 해상세력들도 이곳을 왕래했을 것이다. 장동 머구리동산 전방후원분은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고분내에는 3기의 일반묘가 있다. 아마도 이곳이 고분인지 모르고 그냥 무덤을 만들었을 것이다. 무덤위에 무덤이 있는 기묘한 형국이다. 이중에서 하나는 전방후원분의 제일 높은 등성이에 위치해 있다. 이 지점은 1,500년전에 석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곳이다. 정확히 그 지점에 묘를 만들었다.

두 개의 묘가 포개져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곳 ‘머구리잔등’이 야산으로만 알고 묘를 썼을 것이다. 마을과 가까이 있고 개구리모양을 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사람들이 보기에 최적의 묫자리 였을 것이다.

그리 높지 않은데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것도 묘를 쓰기에 좋은 조건이다. 지금은 묘 3기가 보이지만 지난 1,500여년 동안 몇 개의 묘가 들어서고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다.    

현재 전방후원분은 강진읍에 사는 한 주민의 소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방후원분 위에 있는 개인묘들는 귀찮은 옥상옥 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그동안 전방후원분을 지켜온 수문장 구실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곳에 묘지들이 있어서 살벌했던 경지정리 시대를 무사히 넘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묘지들이 있는 ‘머구리잔등’을 불도우저가 차마 쓸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파견설, 백제 파견 왜인설등 다양

그럼 이 일본식 고분들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일본인들은 이에대해 한때 일본이 한반도 서남해안을 지배한 흔적이라고 다수의 의견을 내고 있다.

이에대해 국내학자들은 일본이 파견한 왜인설, 백제가 파견한 왜인설,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계 후예들 가운데 영산강 유역으로 망명한 귀향설, 재지 세력설 등 의견이 다양하다. 확실한 결론이 없는 상황이다.

왜인 파견설은 영산강 유역과 왜 사이에 교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왜인을 파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영산지중해상의 남해만 일대 등 주요 항구가 밀집한 곳에 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까닭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백제가 파견한 왜인설은 웅진 천도 후에 영산강 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력이 떨어지자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왜계 백제 관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계 백제 관료라면 당연히 영산지중해의 중심지에서 활동하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산강 외곽지역에 단독분 위주로 산발적으로 조영된 점, 특히 영산강 유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핵심 지역을 방치한 채 외곽지역에 위치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마한계 귀향설은 원래 영산강 유역에 장고분과 대형 옹관묘를 축조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전자가 큐슈지역으로 이주했다가 귀향하며 조영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장 또한 일본 현지에 이주한 마한인들이 장고분을 묘제로 채택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어떻게 200여 년 넘게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채 귀향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재지 수장설은 영산강 외곽지역에 산재되어 있던 토착 세력들이 남하하는 백제의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조영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5세기 후반 특정 공간에 배치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재지 토착세력과 관련성이 없고 이 지역에서 대형고분을 조영할 정치세력의 역량도 없었다는 반대의견에 봉착하고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일본식 무덤이 강진을 비롯한 영산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인데, 고대국가 시절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어떤 이유에서 교류를 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강진의 전방후원분 존재가 알려진 후 2013년 6월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장동마을 현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몇몇 일본 학자들이 한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속마음이야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역사를 지배와 피지배의 개념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과거 두나라의 교류를 근거로 해서 오늘날 두 지역이 더 좋은 교류를 한다면 그게 바로 역사가 아니겠느냐”고 입을 모았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렇게 생각해서 나아가면, 오늘날 우리가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미래를 기획할 재료로 삼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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