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여년전 강진에 자치국가가 있었다는데

마한시대 침미다례라는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군동 라천리 일대의 모습이다. 뒷산이 비파산인데, 예전에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발굴되고 영산강 유역에 분포돼 있는 옹관묘도 발견돼 침미다례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 외에도 군동 풍동마을도 역시 침미다례 지역이었다는 주장들이 있다. 모두 오래전에 탐진강 물이 가까이 들어왔던 곳이다.
대구 남호마을에서 장흥 회진까지 설치된 석성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1년에 한번정도 가보는 곳 이지만 올해는 심정을 더욱 굳히게 됐다. 그것은 ‘말을 가둬 기르거나 훈련시킨 목장이었다면 굳이 튼튼히 석성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었다.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 목장을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목장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는 목책하나면 족하다. 그렇게 하면 말들은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풀먹고 뛰어 논다. 큰 목장 뿐 아니라 제주도에 널려 있는 사설 승마 교습소나 승마 체험장등도 길다란 통나무를 걸쳐서 만든 목책 울타리가 전부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다. 전쟁터에 나가 싸운 용맹스러움이 있지만 작은 장애물도 피해가는 습성이 있다. 전국체전이나 올림픽에서 말이 장애물을 넘어가는 종목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 장애물을 뛰어 넘어가는 것은 고도로 훈련된 경주마나 가능한 일이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은 제주 조랑말에게 장애물을 뛰어 넘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조랑말을 가둬 기르기 위해 높이 2m, 폭 1,5m에 이르는 석성을 만들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되지 않은 일이다.

견고한 석성, 군사시설 추정가능

대구 석성 하단을 바치고 있는 돌들의 모습이다. 큰 돌로 튼튼하게 기초를 다졌다. 말목장의 울타리로 성을 만드려면 간단한 목책만 설치해도 되기 때문에 이 큰 돌들은 군사적 성일수 있다는 추정을 하게 한다.
더욱이 석성은 아주 견고하다. 아래쪽은 직경 1m가 넘는 큰 돌을 괴어 기반을 튼튼하게 했고, 올라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다. 또 성벽의 남쪽에는 계단 비슷한 구조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성으로 오를 수 있게 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는 적을 방어하는 기능이 보이는 성이다.

그럼 저 성은 과연 무엇일까. 갈수록 궁금증이 더해 진다. 고성 전문가들이 이 성을 연구하면 성의 축조시기나 기능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몇가지 추론을 할 수는 있겠다.

물론 훗날 성 전문가들이 연구해서 성의 기능을 명백하게 밝히면 허무한 주장이 될지 모르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이번주 인문기행은 석성의 의미를 추론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좋을 것 같다.

석성과 연계해서 우선 먼저 생각되는 것은 마한시대다. 저 성이 마한시대 성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앞서 설명했듯이 훗날 연구해서 그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다. 특히나 마한시대 또는 그 이전의 성은 토성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한시대 성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이지만, 이 성을 하나의 부족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성일지 모른다는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마한시대의 강진을 살펴보면 어떨까 한다. 일단 관심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잠시 마한시대로 돌아가 보자.

마한시대는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경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의 통칭이다. 물론 강진지역 역시 마한 지역 어느 소국에 포함됐을 것이다. 마한의 역사는 수수께끼라고 한다.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한은 54개의 부족국가들이 하나의 연합체를 이룬 국가로 추정되고 있다. 언론인이면서 역사학자로도 업적을 쌓은 천관우(千寬宇, 1925~1991) 선생은 전남 지역에 13국이 있었다고 추정하였고, 임영진 교수 역시 최근 고고학적인 유물을 토대로 14국 안팎의 소국이 있었다고 살폈다. 이렇게 보면 전남 지역에는 적지 않은 연맹왕국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럼 강진은 그 중 어느 족이 있었던 것일까. 이는 마한의 역사만큼 수수께끼다. 학자들의 의견도 다양하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강진이 구해국이란 부족국가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마한에 속한 1개국이 강진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추정케하는 유물들이 있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는 대형 옹관묘는 이 지역 마한의 전통적인 묘제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옹관묘의 상한 연대는 3세기대로 간주되고 있는데, 군동면 파산리 호동·금곡, 풍동리 풍동·봉산 고분군의 주변에서는 옹관편이 발견되고 있다. 봉분을 지닌 소형 고봉군이 10~20기씩 밀집하여 분포한 것을 볼 때 옹관묘로 지목된다.

이에따라 강진 지역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영산강유역 마한제국의 일원으로 성장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한사군 설치 이후 철기 생산기술이 본격적으로 보급됨으로써 철기를 이용한 농기구와 무기의 제작은 마한에서도 농경 기술의 발전과 소국들의 지배력 강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강진 지역 역시 예외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강진에는 어떤 소국들이 존재했을까. 이 교수에 따르면 이와 관련해 일본의 역사책인「일본서기」에서 강진 지역으로 지목되는 중요한 항구의 이름인 고해진과 16세기에 편찬된 인물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힌 ‘구계소’라는 지명을 주목할만 하다고 한다.

구계소는 일본서기에서 ‘고게이’라고 읽힌 고해진의 이름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고해진 의 ‘고해’의 당시 발음인 ‘고게이’ 및 구계소의 ‘구계'와 음이 유사한 구계국 즉 구해국을 강진에 소재한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해국은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영산강 유역에 어떠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을지는 문헌기록을 통해 유추하기는 어렵다. 다만 서해안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대외적인 교류는 매우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러한 교류는 교역의 형태로 발전하게 마련이었다.

침미다례의 강진 군동으로 비정

역시 이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은 북쪽으로 노령산맥이 가로막혀 있는 반면에 남동쪽으로는 해변을 통해 경상남도 남해지역의 가야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도 그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들 세력은 노령산맥이라는 천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해 백제와 대치하면서 그 남진을 저지하는데 어느정도 효과를 얻었다.

반면에 영산강유역 세력은 해안선을 이용해서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과의 교류 및 중국과의 접촉등을 통해 진취적이고 폭넓은 세계관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교수가 주장하는 강진의 ‘구해국’ 설이다. 그 범위가 대단히 넓은 주장이다.

제주의 한 목장에서 말이 풀을 뜯고 있다. 뒷쪽으로 목책이 보이는데 이렇게 목장은 목책 몇개면 말 보호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강진은 침미다례라는 부족국가 지역이었다는 주장이 상당한 지배력 있게 퍼져 있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이 중국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진서(晋書)」장화전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286년에 과거에 교섭이 없었던 신미등 20여개의 소국들이 집단으로 중국과 조공외교를 맺고 있다.

여기서 신미의 ‘미’자는 ‘구(舊)’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신미’를 과거에 조공 해왔거나 새로 조공한 소국을 가리키는 ‘신구제국’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대해 이 교수는 이들 소국은 영산강 유역에 소재한 지역연맹체로 밝혀지고 있거니와 그 필두가 되는 신미국은 해남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정이란 것은 그냥 추정해 지정한다는 것이다. 즉 신미국은 「일본서기」신공기에 적혀 있는 침미다례(枕彌多禮)와 동일지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학자 천관우씨는 80년대 초 ‘침미다례는 도무(道武. 백제시대 강진의 이름) 혹은 탐진(耽津. 백제시대 옛 이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씨는 침미다례의 구체적인 위치는 강진 대구일대였다고 했다. 침미다례가 강진일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강진 군동의 호계리, 나천리, 풍동리등에서 마한시대의 분묘형태인 옹관고분이 발견됐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문안식씨의 논문에는 침미다례가 신전 아래쪽인 해남 북일면 신월리 일대라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마한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고, 북일면 일대가 제주와 중국, 일본을 잇는 주요 해로라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여기까지 볼 수 있듯이 침미다례의 위치에 대해 현재 강진설, 고흥반도설, 해남 일대설, 영산강 유역설 등 논란이 많지만 강진지역과 연관돼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강진에서 침미다례로 비정되고 있는 군동의 호계리, 나천리, 풍동리등에 대해 새삼 관심이 돌아간다.

대구 석성은 국가방어 시설?

지금으로부터 2천여전 한 부족의 수도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부족이란 일종의 왕국이다. 탐진강 하류라는 지리적인 조건이 한 부족의 생존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부족을 지킬 군대가 있었을 것이고, 수도를 보호할 성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들이 고대국가들의 필수 조건들이었다.

다시 대구 석성으로 돌아가 보자. 강진의 역사속에 튼튼한 석성을 축조할 정도의 국가가 존재 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마한시대를 빼고 강진은 늘 변방이었다.

백제의 변방, 통일신라의 변방, 고려의 변방. 이 변방 땅에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 땅 덩어리를 송두리째 돌성으로 둘러쳐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저 정도의 석성을 축조하려면 국가 차원의 책략과 지원이 없으면 안됐을 것이다. 다시 궁금해 진다. 저 성은 언제 무엇 때문에 축조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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