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희생 아끼지 않았던 그의 삶 강진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

1949년 해방 직후 출범한 강진기동대 창설기념 사진이다. 뒤쪽으로 강진경찰서 건물이 보이는데 옛 도립병원자리, 지금의 강진우체국자리 바로 아랫쪽에 있었다. 앞쪽 제일 우측 모자를 벗고 앉아 있는 사람이 김영현 선생이다. 김영현 선생은 기동대장외에도 의용소방대장, 귀환동포설립위원장등 많은 명예직을 맡아 활동했다. <사진= 김영현선생 유족 김귀남 제공>
내가 어렸을 때는 강진극장 자리에 강진소방대가 있었다. 강진의용소방대장이었던 김영현 선생은 강진에 화재가 나거나 소방연습이 있는 날이면 소방모를 쓰고 점잖으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소방서로 향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 모습은 흡사 용감한 무사같기도 하고, 점잖은 영국신사같기도 했다.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은근히 처다본 것은 비난 어린 필자뿐이 아니었다. 그의 인품과 함께 그의 외모또한 훤칠했기 때문에 그는 어찌생각하면 남녀노소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소방대에서는 정오(正午) 12시가 되면 사이렌(siren)을 불었다. 사이렌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의 이름이다. 신체의 반은 새이고 반은 사람인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하여 난파시켰다.

강진 어른들은 이 발음을 ‘사이롱’으로 부르거나, 사람들은 보통 의성어로 ‘오〜’라고 불렀다. 목포나 영산포 등지에서는 낮 12시에 포를 쏘았다. 그래서 ‘오포(午砲)’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가 울려퍼지면 짓꿎은 아이들은 “와!~ 귀남이 아부지가 방구(방귀) 낀다”며 웃고 떠들어댔던 시절이 있었다.
 
귀남은 김영현 선생의 아들이다. 그 때가 그립다. 이 글을 카톡으로 70이 훌쩍 넘은 친구들에게 보내면, 친구들의 입에서 회자되어 이를 이야기거리로 대화를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이 재미로 ‘강진인간극장사’를 쓰는지도 모른다. 
  
난민을 도운 귀환동포(歸還同胞) 설립위원장 김영현

경남 마산시의 옛날 사진으로 귀환동포촌의 모습이다. 강진의 귀환동포촌은 이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전체적으로 판자촌 모양이 비슷했다.<사진=경남도민일보 제공>
해방 직후 일본에서 살았던 동포들이 해방의 감격을 안고 속속히 귀국했다. 동포들의 귀국길은 쉽지 않았다. 2차대전 종전 직전의 일본의 상황은 생지옥이었다.

특히 일본의 대도시에는 날마다 미군 B-29의 폭격이 있었다. 재일동포들은 천신만고 끝에 귀국선을 타고 고향에 돌아왔다. 거의가 빈몸으로 강진에 왔기 때문에 당장 거처와 생계가 막막했다. 당시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이들의 생활대책을 위해 강진사회에서는 귀환동포위원회가 결성했다. 위원장에는 재력도 있고 인심이 넉넉한 김영현이 만장일치로 위촉되었다. 주거를 마련하는데는 집터와 건축비가 필요했다.

위원장 소임을 맡은 김영현은 먼저 상당한 금액의 사재를 희사했다. 부족한 재정은 메구(걸궁, 풍물)를 쳐서 충당했다. (혹자는 읍사무소에서 재정을 댔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는 미군정시기라서 그랬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고 본다). 이 사실은 가족들의 증언이다.

우리 민족은 지난 역사 가운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으로부터 931회나 되는 엄청난 외침을 받았다. 전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난민이 발생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혁명, 의병전쟁, 6. 25 한국전쟁을 통해서 백성들은 어육이 되었다.

1627년 1월 정묘호란 당시 여진족이 후금(後金, 後의 淸나라)이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하여 친명배금정책을 구실삼아 3만 5천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파천했다. 결국「형제의 국」으로 지내기로 맹약하고 화의가 성립되었다. 후금군의 철수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황해도에서온 보고에 의하면 “산골과 해안 지대에서 아들 딸과 재물을 마음대로 쓸어갔습니다. 지금의 화친은 백성을 살리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백성들이 어육(魚肉)으로 돌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인조실록, 5년 3월 10일, 정축)

이러한 전쟁 이후에 발생되는 문제는 부모잃은 아이들 가정이 깨어져 흩어진 유랑민들이 당시의 사회적 문제였다. 이러한 난민에 대한 구호와 구제가 바로 「이 땅이 인간됨의 사회인가」의 시험대가 되는 것이다.

6. 25 직후 필자가 어린시절에 본 강진미국공보원에서 상영된 대한늬우스(뉴스, News)의 대부분은 난민생활복구와 지원에 관한 영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또한 당시 월남피난민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충분하지는 못했다.

해방 직후 강진에 들이닥친 난민은『귀환동포』였다. 이들의 주거문제가 강진의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강진사회에서는 적산관리위원장 김영현의 사재헌납과 지역주민의 협력으로 당시 방 한칸 정재(부엌) 한칸짜리 초가연립주택 20채가 두 줄로 지어졌다.

당시의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상으로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사업이었다. 당시의 농촌주택은 큰집이라야 사칸집, 작은 집은 초가삼간집이었다. 필자가 어려서 우리들은 그곳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기한동포」라고 불렀다.

그 터는 강진동초등학교 바로 건너편이었다. 귀한동포(歸還同胞)라면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튀밥집」이 두 군데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먹거리나 간식거리가 귀한 시절에 튀밥은 아주 맛있는 먹거리였다.

아이들은 튀밥기계 앞에서 튀밥이 빨리 튀어지기를 기다리면서도 가슴을 졸인다. “펑”하는 소리가 들리면 얼굴을 찡그리면서 귀를 얼른 막아야 했던 것이다. 안막으면 고막이 터진다는 것이었다. “펑”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긴 철망통에 가득 담겨져서 튀겨져 나오는 뜨거운 튀밥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 별미였던 것이다.

이 귀환동포가 목리 남전(현재의 한전) 가기 전에 왼편에 연립식 초가로 지은「귀환동포」가 있었다고도 하고, 물건너(목리다리 건너) 왼편 신학, 신평 뚝방 아래 연립식 초가로 지은「귀환동포」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고, 아니라는 설도 있다.

친구 김귀남은 30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시 귀환동포가 고내 20채, 목리와 물건너에 10여채 합해서 30채일 개연성이 있다. 아마 이 문제로 필자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필자는 공동의 기억을 모아 흑백사진같이 빛바랜 강진향토사를 복원해 보자는 것이다. 사실 국사의 원류는 지역사, 향토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은퇴 후 이런 소소한 재미와 긴장을 맛보면서 살고 있다. 
  
평생 돈버는 직장 가져본적 없고, 급료있는 공직도 맡아본적 없던 사람  
 
김영현은 평생에 월급이 나오는 직장과 고정수입이 생기는 공직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해방직후 강진의 지도자들은 김영현의 공정성을 신뢰하여 「적산관리위원장」을 맡겼다.

당시 강진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 중에는 일본 유학을 하고 왔거나,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나온 인사들도 상당수 있었고 대부분 지주출신이 많았다. 사실상 당시 강진읍은 지주세력이 주도성을 갖는 우익진영이 좌지우지하던 곳이었다.

이 가운데 일본 적산처분에 관한 관리를 맡을 사람이라면 정직성. 청렴성, 공정성을 인정받을 뿐 아니라, 공적인 재물의 불하에 관련된 직무에 사익을 추구할 의심을 받지 않을 만큼의 재산도 있는 사람이 적격이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은 가옥, 전답, 임야 등 그 규모가 막대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1960년대까지도 적산처분업무을 관리했던 관재국이 존속했고, 관재국장에는 1928년 광주고보 4회 졸업생 조재희(趙在熙, 광주서중․일고 동문회보참조)에 이어 필자의 선친로서 같은 금릉계원(金陵係員)이었던 김기홍(金基洪)이 재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관재국은 극장통에서 세무서로 올라가는 길목의 왼쪽, 강진소주(金悠洪) 마당의 오른편에 위치한 일본식 건물이었다. 그 공터는 가끔 스크린(광목포장)을 내걸고 영화가 상영되던 가설극장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적산관리위원장 김영현이 평생동안 강진에서 맡은 직책들은 봉사만하고 급료는 없는 기동대장, 소방대장, 도교육위원장과 같은 명예직이었다.
 
일본에서 번돈으로 꼿감(곳감) 빼먹듯이 생활비와 교육비로 쓰고 나머지로 생활의 여유를 즐기면서도, 사회에 봉사하는《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한 사례를 남긴 것이었다.《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선행과 의무를 뜻한다./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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