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돛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은 갑자기 태풍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때 무명베로 자기 몸을 배에 묶었다. 속장(束裝)이라는 것이다. 풍랑에 배가 뒤짚혔을때 시신이 튕겨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머리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지 않도록 얼굴은 천으로 덮어 감쌌다. 조선시대(1770년) 제주도 애월읍에서 일행 29명과 강진읍 남포마을로 오던중 태풍을 만난 장한철이란 사람은 그 절박한 상황을 ‘장한철의 표해록’이란 책에 전하고 있다.

‘큰 물결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고, 회오리 바람은 바다를 체질하듯 들까불어 댄다. 뱃사람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죽음을 기다릴 지경이다. 속장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배는 울부짖음과 성난 파도소리, 휙휙 바람소리 뿐이다’

그 속장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강진에도 많다. 옹기배를 몰고 여수, 부산까지 다니던 칠량 봉황마을 옹기장수들이나 추자도에서 멸젓을 싣고 강진읍 남포마을로 오가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옹기배 사람들은 한 배에 아버지와 아들이 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이유에 대해 태풍을 만나 위기에 처했을때 부자가 서로 생존 기회를 양보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반대다.
 
배가 위험이 닥치면 사람들은 먼저 살려고 돌변한다. ‘애미 애비 몰라본다’는 말이 그 상황에 딱 맞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난 상황은 그토록 절박하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 속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사람은 강진읍 남포마을 젓갈장수 한기례(85) 할머니로 기억된다. 한 할머니는 친정어머니(1984년 작고)때부터 전통 추자멸젓을 취급했다. 친정어머니를 따라 다섯 번 정도 추자도에 갔고, 혼자서 열번 정도 들어갔다.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상추자도에서 돛배에 젓동우(생멸을 담은 옹기)를 가득싣고 출발해 넙도라는 곳을 넘어 오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었다. 두어 시간을 휘청거리면서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한 할머니는 입고 있던 무명저고리의 옷고름을 배에 묶었다. 시신을 배 주변에서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다행히도 넙도에 도착했다.

추자멸은 그렇게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 남포마을까지 왔다. 다시 남포에서 오랜 숙성기간을 거쳐 남포멸젓으로 태어나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보통 역사가 아니다. 지금은 경남 남해 미조항에서 생멸을 가져오지만 남포멸젓의 명성은 여전하다.
 
남포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갈대축제가 성황리에 끝났다. 앞으로 갈대축제장에서 남포멸젓의 명성을 잇는 젓갈축제도 함께 열었으면 어떨까 한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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