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 은행나무는 110년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강진읍의 관광명소중 영랑생가가 빠질 수 없다. 영랑생가는 봄에 모란꽃이 피어 아름답다. 하지만 가을철에도 영랑생가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바로 영랑생가 입구에 커다란 은행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가면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한눈에 보더라도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나무 크기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랑생가의 은행나무는 누가 심었고 수령이 얼마나 됐을까? 정답은 2019년을 기준으로 약 110년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지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지만 유명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영랑 선생은 휘문의숙에 재학중이던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구해 구두밑창에 감추고 1919년 3월 8일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왔다.

비밀스럽게 추진했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발각돼 강진 4.4독립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돼 6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옥살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영랑 선생은 1920년에는 일본 청산학원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영랑생가에서 매년 가을이면 아름다운 빛을 뽐내는 은행나무의 수령은 김학동이 쓴 ‘김영랑 전집.평전’이라는 영랑 산문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 내용중 영랑이 쓴 ‘감나무에 단풍 드는 全南의 9월 《朝光》1938년 9월’에 보면 ‘뜰 앞에 은행나무는 우리(영랑) 부자가 땅을 파고 심은지 17, 8년인데 한 아름이나 되어야만 은행을 볼 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고 있었더니 천만의외 이 여름에 열매를 맺었소이다. 몸피야 뼘으로 셋하고 반, 그리 크잖은 나무요, 열매라야 은행 세 알인데 전 가족이 이렇게 기쁠 때가 없소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미뤄봤을 때 1920년경 영랑 선생과 부친 김종호씨가 심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10년정도 되는 묘목을 심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110년 정도 수령이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내가 2004년 문화관광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 영랑생가를 둘러보고 있는데, 내가 담당과장인줄 모르는 영랑생가 관리인이 내게 다가오더니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수령이 300년을 훌쩍 지난 나무라고 하며 그럴 듯한 내용을 첨언해 가면서 장황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관리인이 탐방객들에게 잘못 설명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담당 직원에게 영랑의 산문집을 꺼내 보이며 안내판을 세우되 탐방객들이 내용을 읽은 다음 수령을 유추 해보도록 수령은 기재하지 않고 산문집에 수록된 영랑의 글만을 넣어 관광객들이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은행나무 옆에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985년 영랑생가는 매입 당시 은행나무 부분은 축대만 있고 담장은 설치되지 않았다. 매입후 군에서 담장 43.5m를 보수하면서 기존 축대에 1m 정도의 높이로 담장을 쌓고 흙으로 복토처리했다. 은행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사회단체에서는 의자도 설치해 여름철에는 수 많은 관광객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 뿌리위에 복토와 다짐현상 등 생육환경 변화로 갑자기 은행나무가 고사 위기에 직면했다. 나는 나무주변의 의자를 왹곽으로 이전 설치하고 나무 주변에 다져졌던 흙을 걷어내 나무가 숨 쉴 수 있도록 했고 물 빠짐도 원활하게 조치했다.

은행나무는 모진 고초도 겪어왔다. 지난 2012년 8월 태풍 볼라벤이 강진지역을 휩쓸고 지날때 나무 상부의 30% 정도가 부러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스럽게도 영랑생가의 은행나무는 맹아력이 좋은 연유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치유가 되어 영랑생가의 대표적 가을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요즘도 나는 가을이 되면 영랑생가의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보러 찾곤 한다.<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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