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스포츠 즐긴 멋쟁이, 집에서는 채소 돌보며 ‘자연인’

강진의 명견 자크

1959년 강진읍내 거리의 모습이다. 전쟁이 끝난지 많은 세월이 지난 시절이 아니었지만 김영현 선생과 같은 지역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뛰어 들면서 지역사회는 활기를 되찾았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김영현 선생은 엽사(獵師)로서 사냥도 즐겼다. 아들 김부준(교사)의 전언에 의하면 연세가 들었음에도 체력과 지구력이 남달라서 사냥총을 메고 사냥개들을 데리고 산등성이를 무수히 올라 다니던 백발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1950-60년대 그 이후 필자가 아는 강진의 명엽사로는 김영현선생을 비롯해 황창주(서울시계점), 박현수(우진약방), 박병춘(재야정치인) 이후에 필자의 초등학교 동창인 김부준(교사)의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도 사냥이라는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스포츠지만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엽사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했지만 품위를 가지고 있었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사냥이 점잖은 스포츠로 통했다. 엽사를 얘기하면 사냥개가 떠오른다. 당시 강진에는 유명한 사냥개가 한 마리 있어서 늘 주민들의 화젯거리였다. TV에 나오는 아이돌 스타 이상이었다.

강진 극장통(劇場通)에서 동문안 쪽으로 굽어 들어가면 왼편에 상당한 규모의 일본식 주택 두 채가 나란히 있었다. 그곳을 못가서 골목으로 접어들면 당시에『절집』으로 불리웠던 일본식 절인 신사(神社, 진쟈) 건물이 남아 있었다. 일본식 집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가옥형태를 갖춘 주택이었다.
 
1950년대 중반 무렵 이 집의 대문에는 항상 귀가 쫑긋하고 작은 송아지만한 세퍼트(shepherd,  양치는 목동에서 유래) 쟈크가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무서워서 슬슬 피하면서 멀찌감치 돌아다녔지만, 쟈크는 조무래기들에게 으르렁 거리는 개가 아니었다.

집안식구들의 친척, 친구, 드나드는 사람들을 다 알아보았으므로 쟈크가 사람을 무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차림새가 허름하고 어수선한 모습을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때야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짖어 대면서 주인에게 알렸던 것이다. 

강진에서 스타대접을 받았던 명견 ‘자크’와 같은 품종인 세퍼트다. 사냥개로서 명성이 높은 개이지만 머리가 좋아 주인의 심부름도 잘하는 귀여움이 있었다.
쟈크는 1953-4년경 목포에서 열렸던 우수견(優秀犬)경연대회에서 우승한 2세짜리 영리한 개였다. 여기서 나의 초등학교 동창 김귀남의 선친(先親) 김영현(金榮炫)이 구입해온 개였다. 쟈크는 시장 바구니에 품목을 써서 넣어주면 저재(저자)에 가서 시장을 봐오는 개였다.

저재는 정기 장날인 5일장 외에도 오전 12시경까지 열리는 강진 특유의 사람사는 맛이 나는 매일시장이다. 저재에는 남포에서 올라오는 펄펄뛰는 숭어, 갯장어, 돔, 갈치같은 생선이며 싱싱한 반지락(바지락), 대합, 노무새(채소)도 나오고, 나무전도 있었고, 죽전ㆍ떡전도 있었다. 동문안, 고내(동명리), 남문에 사는 아이들에서부터 어른까지 쟈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쟈크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 김귀남(金貴男, 영관장교, 사업가)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는 개였다. 친구가 초등학교 시절 벤또(당시의 일상적 통용어, 도시락)를 안싸지고 가면 쟈크가 도시락을 입에 물어다가 학교까지 배달해 주고 기다리고 있다가 꼬마 주인이 다 먹으면 빈그릇을 물고 다시 집에 돌아갔다.

김귀남 가(家)에서는 개를 여러마리 기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사냥에 재능을 발휘하는 개는 얼룩 점무늬 포인터와 세퍼트인 쟈크였다. 사냥터에 나가면 포인터는 사냥깜을 날리는 역할을 했다. 꿩을 발견하면 급히 쫓아가서 꿩을 날린다. 이 때 주인이 공중을 나는 꿩을 향해 총을 쏘아 맞춰서 떨어지면 물고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쟈크의 역할은 달랐다. 사냥깜 즉 고라니나 멧돼지를 발견하면 사력을 다해 추격전을 벌인 후, 입으로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 놓은 후, 물아다가 주인에게 끌고 오기까지 한 것이다.
 
한번은 도암면(道岩面) 어느 산중에서 쟈크가 사냥깜을 쫒다가 주인에게서 너무 멀리 가버렸다. 주인은 개를 기다리다 밤이 되니 할 수 없이 사냥터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쟈크는 이틀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만큼 회귀본능(回歸本能)이 발달한 개였던 것이다. 쟈크는 자기 흉을 보거나 미워하는 말을 하면, 듣기가 싫다는듯 꼬리를 내리고 멀리 가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친구는 어려서 쟈크를 키우면서 배운 점이 “개가 말은 못하지만 사람 이야기를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다. 쟈크는 영리하고 용맹한 개로, 주인에게 충성한 추억 속의 명견(名犬)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김영현 선생이 사냥개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도 쟈크와 같은 사냥개는 언제든지 갖고 싶은 친구였을 것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어려서 본 기억인데 김영현은 사냥외에도 말에 심취해 있었다. 말도 제주도 조랑말이 아니라 호마(당시에는 큰 말을 일컫음)를 타고 다녔다. 이 말은 강진기마대(騎馬隊)에서 불하받은 것이었다.

당시 강진기마대는 현 강진읍교회 정문에서 터미널 쪽으로 조금 가자면 우측에 초등학교 2년후배 이주연(중앙공장) 안집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초등학교 3년 후배 박승규(의사)의 선친 강진의원 원장 박노북 선생집 옆에 이었다.

또한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선친 김영현이 오트바이도 타고 다닌 것을 보았는데, 그 오트바이는 소위 독일군이나 일본헌병들이 2차대전 당시 타고 나오는 2인승 넓은 오토바이였다. 이것을 반입하게 된 경위를 들어보니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본에 남아서 살고 있는 친지에게 부탁해서 오토바이 중요한 부품을 들여왔고, 이 부속품을 조립하는데 기술력을 보탠이는 강진운수업계의 최고참이라고 불리우는 김남수였다. 당시 강진운수업계에서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이는 일본강점기 운텐샤(運轉手) 시절부터 8순 고령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始終一貫) 택시부 운영 등 운수사업에 종사했던 김인유, 김남수였다.

김남수는 전남여객을 운영하면서 정비공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정비사들과 함께 모자란 부품은 센방(선반기계, 旋盤機械)으로 깎아서 조립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1950년대 중반 당시 전반적으로 산업시설 자체가 열악했던 시절에 강진의 기술력으로 오토바이 조립품을 완성한 것이다.

김영현 선생은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지만 그에 대한 추억은 항상 야전삽과 꽃삽을 들고 나무와 꽃을 가꾸면서, 채전밭에 물을 주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선진적인 문화를 체득한 분이었지만 넥타이를 맨 모습이나 정통한복을 입은 모습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정원과 채전밭을 가꾸는 수더분한 차림의 농부로서의 모습이 내 머릿 속에 각인되어 있다. 농부는 말이 없다.

사계절 꽃피던 정원

그는 안마당 채전밭 뿐 아니라, 동문안에 몇마지기 밭과 시장통 우시장 쪽에 3-4마지기 논을 가진 농부였다. 농부 김영현은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상농부(上農夫)였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의 목적은 여가(餘暇)를 얻는 것이다”(The end of labor is to gain leisure) 그렇다. 농부나 노동자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이들도 노동 이후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나라와 사회가 배려한다. 그는 꽃과 새와 정원수와 식물과 기르던 말과 개와 대화를 하고 살았다. 봄마다 반드시 모종판을 만들고 포트에 꽃씨를 뿌리고 모종이 올라오면 돌 틈 사이에 심는 것이 늘상 하는 일이었다.

정원수는 당시 강진에서는 보기 드문 식물원에서나 보았음직한 수종(樹種)을 심었다. 태산목, 라일락, 수국, 겹동백, 수련(水蓮), 무궁화, 배롱나무, 산벚나무, 단풍나무, 백목련(白木蓮), 자목련(紫木蓮), 천리향 등등의 정원수와 계절마다 꽃이 피는 일년초가 그 분의 정원과 마당에는 지천으로 아울러져 피어 있었다.

그 집에는 정원과 마당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四季)의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녔다. 새도 길렀다. 카나리아, 문조, 십자매, 호은조 등 30여종이나 되었다. 산에서 어린 꿩 새끼를 주어다가 꿩도 길렀고, 칠면조도 한 쌍 키웠다. 물론 닭장도 있었다.

귀남이네 집은 필자와 친구들의 식물원이요, 동물원이요, 내 눈에 보이는 세상 가운데,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학습공간이었던 것이다. 집안에 수컷우량종돈(優良種豚)을 들여다가 기르면서 교배를 시켜 축산농가에 품종이 우수한 돼지를 기를 수 있도록 지역축산진흥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계속>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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