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키 보다 높은 저 돌성은 무엇에 썼을까

대구면 관찰봉 아래 일명 ‘청재나라’ 목장 계곡속에 남아 있는 석성의 일부다. 계곡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들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높이가 2m가 넘는다. 기단석이 매우 튼튼하게 세워져 있고 남쪽에는 계단형태의 돌이 쌓아져 있다. 보통 말을 가두는 울타리의 경우 가벼운 돌담이나 나무 울타리도 이용되고 있는 만큼 이 정도의 석성이 말을 가두기 위해 세워졌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철나무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여름에 산에 올라가 땔감을 베어 둔 다음 그것이 마르면 이맘때 쯤 집으로 가져다가 겨울에서 봄까지 사용하던 땔감이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준데요’하는 동요에 나오는 여름 나무꾼이 바로 철나무를 하던 사람들이다.

연탄시대를 지나 지금은 전기나 가스를 사용하고 있으니 철나무는 아주 옛날 얘기다. 철나무가 사라지면서 무성한 숲을 얻었지만 대신 사라진 것도 많다. 숲이 무성해 지면서 밀원식물이 사라졌다.

큰 나무 그늘에 가려 싸리나무, 산도라지, 딱지(잔대), 상출, 들국화등 30~40년전만 해도 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것들을 이제 거의 볼 수 없다. 숲은 많은 것을 가려 버렸다.

이번 인문기행은 숲이 가려버린 유적을 찾아 떠나 본다. 필자가 고향에서 20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 중의 하나가 있다.

잊혀진 돌성

그것은 대구 남호마을에서 대구 구수마을을 거쳐 관찰봉을 지나 장흥군 대덕읍으로 이어지는 큰 돌성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찰봉 아래 석성의 일부다. 큰 돌들을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고 작은 돌들이 석성의 상단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도그럴것이 돌성을 처음 찾았던 1998년 이미 많은 부분이 파괴돼 었었고 지난 20년 세월을 지나면서 파괴가 심화되다가 이제는 숲에 가려 그마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들판에 드러나 있던 곳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흔적이 거의 사라졌고, 숲속 있는 것은 모두 가려져 하늘의 구글위성도 찾기 어려워 졌다. 이 돌성은 앞으로 더 많이 사라지고 감춰질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강진의 역사에서 이 돌성이 청자나 다산만큼이나 큰 비중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대구 남호마을에서 장흥 회진까지 장장 12㎞나 건축돼 있는 이 성은 분명 잊혀져서는 안될 유적이다. 다시 성이 시작되는 대구 남호마을로 가본다. ‘무엇에 썼던 돌 담일꼬...’이 물음은 오랫동안 강진사람들에게 있어 왔다.

대구면 남호마을의 다른 이름은 성머리마을이다. 이곳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산허리를 지나 장흥 회진 바닷가까지 30리 돌담이 이어지기 때문에 붙혀졌다. 성의 끝마을은 장흥 회진의 성갯마을이다.

성과 갯벌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성의 범위는 마량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국이다. 돌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아주 띄엄띄엄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언가를 막기 위한 기능이 있었다는 것은 확연하다. 대구, 마량 사람들은 이곳을 만리성(萬里城)이라고 부른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성이 만리가 넘고, 성이 바닷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전해 지고 있다. 또 만호성이라고도 한다. 장흥 대덕 사람들은 이곳을 만리장성, 또는 고장성(古長城), 계치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머리마을 서남쪽 바닷가에 성의 흔적이 지금도 있다. 작은 돌은 사람들이 가져다 경지정리때 써버리거나 집 담을 만들어 버렸고, 상당 부분은 밭둑을 조성하는데 쓰였다.

성머리 마을에는 집안 구들장부터 장독대까지 성의 돌이 없는 곳이 없다.  대덕쪽 돌성은 60년대 초반 회진, 덕촌등에 간척사업이 벌어지면서 대부분 실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옛 유물이 이렇게 와해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성이 지금까지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지 조사된적도 없으니 마을 사람들의 조건없는 성사랑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아주 큰 돌덩어리만 군데군데 남아 옛 모양을 전하고 있다. 흔적만 남은 성의 기초부분과 무거워서 사람들이 못 가져간 돌의 크기를 보면 놀랍다.

폭은 160㎝가 조금 넘는다. 남아 있는 큰 돌은 한쪽 길이가 1m가 넘는다. 아래쪽에 굵은 돌로 기초를 다지고 위쪽에 그보다 작은 돌을 올려 균형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높이는 청자박물관에서 대덕으로 넘어가는 대로변에 있는 청재나라 목장 아래 숨은 계속에서 발견된다.

이곳은 1998년까지만 해도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비교적 온전하게 성의 모양이 남아 있었다. 당시 잿던 길이가 폭이 1.5m, 높이는 2m가 조금 넘었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 성벽이 30리를 이어졌던 것이다. 이 돌담을 바라보는 주민들 또는 향토사학자들의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대구면 남호마을 서쪽 끝 석성이 시작되는 바닷가 지점이다. 지금도 큰 돌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곳에서 시작된 성은 장흥 회진면까지 계속된다.
첫째는 이 돌담이 옛날 제주에서 말을 가져와 기르던 목장성이라는 것이다. 강진에 말을 길들이던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돌성의 기능을 말과 연관해 생각하면 수수께끼는 풀린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조선시대때 제주말이 마랑에 도착했을 때 말이 육지에서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해 설치한 석성이나 전문적으로 말을 기르는 목장이었다는 뜻이다.

수수께기같은 성의 기능

석성은 마량을 기준으로 전체적으로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둘째는 제주에서 건너 온 말을 적응훈련하기 위한 성이 꼭 이렇게 커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다.

전체적으로 둥그렇게 육지를 둘러싼 성의 면적은 엄청나다. 지금의 마량면을 중심으로 대구면 일부, 장흥 대덕읍 일부, 회진면 일부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부족국가 면적을 상상케 한다. 제주에서 건너온 말이 연간 수백마리에 불과했는데, 말의 육지적응훈련을 위해 이렇게 큰 성이 필요했겠느냐는 것이다.

양쪽 모두 수긍이 가는 주장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 석성이 언제, 무엇 때문에 건축되었는지 답을 못찾고 있는 이유중 하나다.

우선 이 석성이 말을 훈련시키던 마유성, 다시말해 제주에서 육지에 도착한 말이 잠시 머물던 곳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조선초기라 할 수 있는 태종 7년(1407)에 제주에서 조정에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 실록이 있다.
 
‘매년 육지로 나가는 마필(馬匹)은 여러 날 동안 배에 실려서 풍도(風濤)에 시달렸는데, 육지에 내리는 날에 물을 마시는 것이 절도를 잃어서, 이로 말미암아 병이 나서 가을이 되면 많이 죽으니, 비옵건대, 바다 어구에 성을 수축하고 풀을 쌓아 두었다가, 육지에 내리는 날에 성(城) 안으로 몰아넣어 다만 풀다발만을 주고, 이튿날에 이르러서 이를 흩어놓아 물을 마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제주에서 육지로 건너간 말이 쉬면서 현지에 적응할 수 있는 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400년 이전에 말들이 바다를 건너왔지만 풍토병에 시달리고 물마시는데 절도를 잃어서 죽게 되는 말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50여 년 후에는 강진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단종 1년(1453) 조선왕조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전라도 강진현 계참곶(界站串)이는 둘레가 90리이고, 토산이 비옥하고 물과 풀이 모두 족하여 말 1천 필을 놓아 기를 수 있으니 목장을 설치해야 한다’고 청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 말하는 곶(串)은 만(灣)을 의미한다. 계참의 지명만 분명히 파악하면 될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 부분이 선명하지 않다. 계참이 대구면 계치마을 일대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아무튼 이 기록들은 마량면과 대구면의 경계지점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담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런저런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초기부터 제주에서 마량등으로 실려오는 공마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송출작업이 질서없이 진행되다가 1400년대를 전후해서 한라산에 목장도 축조되고, 육지에는 말이 쉬어갈 목장도 만드는 등 체계적인 공출마 수송시스템이 정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유성, 만리성등으로 불려

그러나 1천마리의 말을 길렀다 하더라도 성의 면적은 너무 크다. 그 정도의 말은 지금의 마량면 지역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말을 가두고 풀을 먹일 공간을 확보하는데 30리가 넘는 울타리를 칠 필요성은 미약해 보인다. 이 성이 말을 가둬 기르는 석성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결정적으로 취약해 지는 것은 석성의 모양에 있다.
 
성의 안쪽에 해당되는 마량, 회진지역에 말을 풀고 가두려면 성벽의 남쪽 부분이 깎아지듯 해야하는데 곳에 따라 계단을 만들어 성안쪽인 남쪽에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했다. 이는 말을 가둬 기르려는 성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될 구조다.

말을 잠시 훈련시키는 장소로도, 말을 전문적으로 기르는 목장으로서도 맞지 않은 것 같다. 갈수록 ‘이 뭐꼬’는 깊어간다. 그럼 저 돌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군사용 성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남해바다를 등에 업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아무도 선뜻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 진다. 저 돌성은 무엇을 위해 축조된 것이란 말인가. 그 숙제를 다시 후배들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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