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화백자가 전해져 오고 국보도 서너점 있지만 이것들은 안료로 쓰이는 회회청(코발트)을 대부분 수입해서 만든 것이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에 판 것을 중국의 상인들이 다시 조선에 되팔았다.

중국상인들이 하도 장난을 치는 바람에 값은 갈수록 치솟았다. 하지만 왕실의 청화백자 수요는 늘고 코발트는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아리비아산이 유일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본지 8월 29일자 ‘강진인문기행’ 참조)

그런데 조선왕조 500년 동안 국내산 코발트를 사용한 세월이 딱 6년 있었다. 전문가들은 1463~1469년 사이에 제작된 청화백자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코발트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근거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전라도에 파견 나갔던(경차관) 구치동 이란 관료가 강진에서 회회청을 얻어 바치었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강진에서 회회청을 바쳤다는 기록이 1463년(세조 9년)에 작성된 것이고 이 때를 중국산 대신 국산 코발트를 사용한 원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조선왕실이 코발트를 국내에서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흔적이 많다. 전국에 코발트를 구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벼슬까지 포상으로 내걸었다. 전국에서 앞다퉈 푸른돌을 주워 한양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1469년(예종 1년) 이런 기록이 보인다.  

‘왕이 승정원에서 교지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치서하기를, 강진에서 생산하는 회회청은 일찍이 채취하여 시험해 보았더니 다른 지역 물건과 달리 간혹 진실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처음으로 회회청을 바친 곳도 강진이었고, 이후 백방으로 노력해서 전국에서 회회청을 찾았으나 오직 강진에서 올라온 것 만이 회회청 색깔을 냈다는 뜻이다.

실록에서 이 기록이 마지막이여서 전문가들은 1463~1469년까지를 국산 코발트 사용 시기로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회회청은 강진에서 시작해 강진에서 끝나는 셈이다. 그후에는 국산 사용이 중단되고 다시 중국산이 들어온다. 품질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이 29일 15~16세기에 생산된 청화매조죽문 항아리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 시기는 조선왕조가 국내에서 코발트를 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시기다. 그 중심에 1463~1469년, 6년의 세월이 포함돼 있다.

청화매조죽문 항아리에 사용된 코발트가 강진에서 생산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청자에 이어 조선시대 백자도 강진과 그렇게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를 뿌듯하게 한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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