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처녀 남포로 시집오고… 그땐 그랬지

2008년 11월 말 남포마을에서 한 주민이 해풍에 생선을 말리고 있다. 갈대축제가 열리는 남포는 추자도를 거문도, 청산도등을 비롯한 남해안 각 섬에서 해산물이 모여드는 집산지였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요즘 추자도는 조기가 한창 잡히는 시기다. 삼치도 제철이다. 부두에 가면 그물 손질하는 사람들이 많다. 추자도에 가거들랑, 나이 지긋한 사람이면 누구나 붙잡고 강진을 물어보라. 그들은 열중 아홉은 강진을 알고, 남포를 가보았다고 말한다.

남포마을로 시집간 친척이 있는 사람, 젓동우(멸젓을 담은 옹기)를 풍선에 싣고 남포로 가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는 사람, 선대의 묘가 아직도 강진읍 기룡마을에 있다는 사람, 강진의 음식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는 사람… 추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강진의 추억’, 아니 ‘남포마을 추억’이 생생히 살아 있다.

추자도에 가거들랑

그럼 남포마을로 가보자. 강진읍 남포마을 박송자 할머니(88)는 스물여섯살이던 1954년에 제주 추자도 대서리에서 남포마을로 시집을 왔다. 추자도 배들이 수시로 남포마을을 드나들던 때다. 추자도에서 남포를 오가며 멸젓 장사를 하던 집안 어른의 중매로 남포청년을 소개 받았다.

그때는 섬에서 육지로 시집오는게 큰 꿈이었다. 남포마을 청년 최동식(작고) 선생과 사이에 2남2녀를 낳았다. 자식들을 잘 키워서 강진군청에 근무하는 장남 최재용씨는 지난해 사무관으로 승진해 지금은 강진군의회 전문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박송자 할머니는 이제 청력을 많이 잃었다. 어떻게 남포로 시집을 오게 됐느냐는 물음에 “내 팔자는 내가 알어서 하는것이제 부모들에게 의탁할게 아니제”라는 말을 비교적 또렷하게 했다.

당시 추자도에서 육지 남자와 결혼을 ‘결행’하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뜻이었다. 그때 남포마을로 시집 올 때 박송자 할머니를 뒤이어 친구 한명도 또 남포로 시집을 왔다. 친구따라 강남간 게 아니라 친구따라 남포로 시집을 왔다. 그런 경우가 참 많았다. 먼저 남포마을로 시집 온 사람이 친정마을 친구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008 겨울 추자도 대서리 상가앞에서 한 주민이 조기를 말리고 있다. 추자도에서는 지금은 멸이 잡히지 않고 10월부터 조기가 많이 잡힌다. 이처럼 해풍에 고기를 말리는 모습은 남포와 추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이렇게 해서 남포마을로 시집와 가정을 꾸린 사람이 아주 오래전 많을 때는 10여명까지 있었다. 지금은 박송자 할머니와 올해 66세인 고영혜 씨 둘이 남았다. 고영혜씨의 경우 추자도에서 남포로 시집 온 마지막 사람으로 통한다. 23살 때인 1976년 남포마을에서 추자도로 시집 온 사람이 친정인 남포마을의 청년을 소개해줘서 결혼을 했다. 당시만 해도 남포와 추자도를 오가는 젓갈 실은 배가 있었다. 고씨는 “시집 올때야 어떻게 멸젓 실은 배를 타고 올수 있었겠느냐. 목포로 여객선타고 왔다”고 웃었다. 

남포마을에 가거든

스물여섯살이던 1954년 추자도 대서리에서 강진읍 남포마을로 시집 온 박송자 할머니. 남포마을에는 박송자 할머니와 같이 추자도에서 시집온 여성이 10여명에 달했다.
박송자 할머니와 같이 추자도에서 남포마을로 시집 온 경우도 있지만, 남포마을에서 추자도로 시집간 사례도 많았다. 남포마을이 친정인 방영초(90) 할머니가 대표적이다.

결혼 후 친정마을로 나와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후 지금은 서울 자식집으로 이주했다. 방영초 할머니의 경우 스무살되던 해 가을에 제주도 추자읍 횡간도 청년 이형규(당시 24세)씨에게 시집을 갔다. 방할머니의 청춘은 남포와 추자도간에 활발했던 뱃길만큼이나 신비스러웠고 행복했다.

그때 방할머니는 예뻤다. 동쪽(남포마을의 동편)의 친척집에 심부름을 갔는데 마침 먼 친척집에 놀러왔던 추자도 대서리 청년 이형규의 눈에 띄었다. 추자도 청년은 남포 처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사진을 몰래 구해서 그날로 남포에서 추자도 배에 올라탔다. 고향 횡간도의 부모님께 당장 결혼 허락을 받고 싶었다.

추자도에 도착한 이형규씨는 부모님에게 사진을 들이대며 그랬다. “나 이 처녀와 결혼할라요” 부모님은 “얼마나 좋은 처자길래 네가 그러냐”며 안스럽고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러면 그 처자를 봐야겠다고 출항 일정을 곧바로 정했다. 며칠 후 부친과 같은 섬에 사는 친척 등 네사람이 돛배에 올랐다. 육지의 며느리감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혼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후로 1년 후 남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때는 1953년 음력 10월 17일. 추자도에서 하객들이 왔다. 마침 10월 중순은 추자도 멸젓이 육지로 나오는 계절이었다. 결혼식이 끝났으니 이제 시댁으로 가야할 순서였다. 처음 타보는 풍선이었다. 그렇게 먼 여행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기분만은 좋았다. 신랑이 함께 있었고, 무엇보다 며느리를 끔찍이나 이뻐해 주는 시아버지가 좋았다.

어느덧 돛배가 햇살을 받으며 횡간도 포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포구에는 육지에서 들어오는 새색시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마을을 비워놓고’ 나와 있었다. 새색시는 배가 부두에 닿자 사뿐히 섬으로 내려갔다. 이 모습이 섬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좋게 보였나 보았다.

추자도에서 시집온 사람들

“추자도로 시집 올려고 타고 났었구나. 배에서 홀짝 뛰어내리는게 쉽지가 않은 일은데…?
그날밤 잔치를 하면서 섬 할머니들이 새색시를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매일 잔치가 벌어졌다. 섬사람들은 모두가 친척이고 인척이었다. 돌아가면서 새신랑과 신부를 불렀다. 반찬이 모두 전라도 맛이었다. 진수성찬이었다. 새신랑과 새신부가 섬을 떠나 오던 날 시아버지는 깨끗한 배를 내 주었다. 배에는 멸젓동우가 가득 실려 있었다. 멸젓은 육지에 가지고 나가면 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가지고 나가서 신혼살림에 보태쓰라는 것이었다.

또 아들에게는 소 한마리와 논 아홉마지기 살 돈을 건네주며 사돈집에 드리도록 했다. 딸을 섬으로 시집보내 준데 대한 일종의 감사의 표시였던 셈이다. 소 한마리 값과 논 아홉마지기 값은 당시 농촌에서 팔자가 바뀔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신혼생활은 시작됐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남편 이형규 선생은 고인이 됐고, 방영초 여사도 고령이 되어 이제 남포마을을 떠났다.

남포마을과 추자도의 교류 사례는 이밖에도 수두룩 하다. 다음 기회에 또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강진의 남포마을이었을까. 추자도에 갈수 있는 뱃길은 완도도 있고 해남도 있으며, 목포도 있는데 왜 하필 강진의 남포마을과 그 많은 교류를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추자도로 시집간 사람들

요즘 추자도와 가장 가까운 행정도시는 완도다. 그곳에 각종 생필품이 다 모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1970년 이후의 일이다. 완도는 1968년 12월 달도~원동간 연도교가 놓이기 전에는 완도는 순수한 섬일 뿐이었다. 모든게 부족한 곳이었다.

완도가 육지와 연결된 것은 1963년 4월 23일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와 완도군 군외면 달도와의 연장 138m를 연결한 연륙사업이 1단계였고, 이후 1968년 12월 달도~ 원동간 560m 연장 중 중심부에 연장 128.9m의 철교인 완도교를 가설해 완공한 것이 2단계 사업이었다. 완도는 2단계 사업이 완료된 후에야 완전히 육지가 됐다. 추자도 사람들이 생필품은 찾을 당연히 다른곳에서 찾아야 했다.

해남은 지금은 많은 간척지가 생겨서 쌀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쌀이 아주 귀한 곳이었다. 면적은 넓지만 강진보다 생필품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 해남이었다. 또 목포의 경우 추자도에서 왕래할 경우 울돌목이란 위험지구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돛배가 운송수단이던 시절에는 사공들이 피하고자 했던 뱃길이었다. 장흥은 유명한 포구가 없을 때였다.

대신 강진은 일단 뱃길이 강진만 깊숙이 뻗어 있어서 강진읍내까지 직접 배가 올 수 있었다. 남포마을은 배가 닿는 기지였다. 강진은 무엇보다 쌀을 확보하기가 좋았다. 간척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작천등지에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진읍 남포마을은 남해안 각 섬에서 수산물이 집산하는 곳이었다.

큰 도방(도매점)들이 있어서 섬에도 들어오는 해산물을 금방 처리해 주었다. 추자도를 비롯한 섬사람들에게 남포는 육지와 섬을 잇는 교두보이자 각종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도회지였던 것이다.

필자는 5년전 거문도에 놀러갔다가 거문도~ 백도간 유람선을 운항하는 황해연 선장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젊었을 적 고등어를 소금에 절여 강진으로 팔러 갔던 때를 재미있게 설명했다. 그는 젊었을 적에 남포를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했다.

어선에서 돈을 벌던 시절, 거문도 일대에서 잡은 고기를 싣고 곧바로 남포로 직행을 했다. 60년대 이야기이다. 남포에 오면 여러 가지 물품이 넘쳐났다. 섬에는 귀한 쌀을 구할 수 있었고, 야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남포에 있던 중간상인들을 통해 이뤄졌다.

굳이 강진장에 가지 않더라도 배를 정박하고 남포의 여러 술집에서 몇날을 방잡고 있으면 중간상인들이 바닷고기를 구입해 주었고, 배위에 쌀과 채소를 올려 주었다.

그는 당시 남포마을에서 중간상인을 하던 주민들의 이름을 술술 외었다. 남포마을에만 술집이 다섯군데가 넘었다. 그때까지도 선장의 기억속에 선한 것은 강진의 한정식이었다. 남포에 배를 대고 강진읍으로 들어가면 섬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한정식 집이 많았다.

섬지역 수산물 남포에 다 모였지

여수에도 그런 집이 귀한 시절이다. 거문도와 뱃길로 가장 가까운 고흥은 아예 한정식 문화가 없을 때였다. 남포에는 거문도에서 가는 배만 있는게 아니었다. 추자도 배도 많았고, 일본을 오가는 상선도 있었다.

일본으로 광석을 실어나르는 배 선원들도 한번 배를 대면 며칠씩 강진읍에 머무르며 ‘강진의 주점 활성화’에 일익을 했다. 남포는 추자도를 비롯한 여러 섬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항구로 자리잡았다. 일종의 선점이었다.

인간관계가 끈끈하게 형성돼 다른 지역 항구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인연이 묶여 졌다. 바다를 한가운데 두고 최초의 거래가 시작되는 것, 전화도 없고 담보물도 없던 시절 내가 저 사람을 믿어도 되겠다고 느끼는 첫 번째 경험. 이것은 육지와 섬사람을 연결해주는 가장 두툼하고 끈질긴 줄이었다. 알고보면 올해 여든 여덟된 박송자 할머니가 남포로 시집온 것도 그런 인연의 출발점 아니었겠는가.       /글·사진=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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