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축제 열리는 남포는 도회지(都會地)였다

남포는 지금도 강진읍에서 큰 마을에 속한다. 조선시대때는 남당포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내륙 깊숙한 강진만의 끝지점에 위치한 남포마을은 제주도를 오가는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때문에 공적업무로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곳 남포를 통해 들어가고 나왔다. 그런 공적업무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접대하고 송별하는 업무를 강진사람들이 도맡아 했다. 그래서 도회지라 불렀다.
형제분들이 도회지에 나가 산다면, 대분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광주나 서울을 떠 올릴 것이다.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당연히 사용해 왔다.

도회지(都會地)란 이미지는 떠들썩하고, 번화하고, 신문물이 들어오고… 그런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게 도회지다. 그러나 서울과 광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리 강진에도 도회지란 이름을 가진 곳이 있었다.
 
바로 갈대축제가 열리는 곳 지척에 있는 강진읍 남포마을이다. 남포마을은 이미 조선시대때 도회지란 칭호를 받았다.

서울과 부산만 도회지가 아니라…

제주로 들어가는 관문인데다 남해안 지역 각 섬의 해산물의 집산지였던 남포마을은 지금도 건물들만 바뀌었을 뿐 옛 영화를 느낄수 있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요즘 도회지의 의미 그대로 떠들썩하고, 번화하고, 신문물이 들어오는 곳이이 바로 남포마을이었다. 갈대축제 그윽한 10월, 도회지 남포의 옛 역사를 회고해 보자.

조선왕조는 제주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원활한 해상교류를 하기 위해 일정한 틀을 만들었다. 그때 나온 말이 도회다. 도회란 조선시대에 특정한 행사를 여는 것이었고, 그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 곳을 도회지라 했다.

조용한 곳에 어떤 행사가 열리니 그 고을이 떠들썩 했을 것이다. 그 의미로 도회지가 지금도 그렇게 쓰이고 있다. 그 세부사항으로 들어가 보면, 조선시대때 언제부터인지 강진은 제주도로 들어가는 관리나 사신을 접대하는 도회를 맡아 처리했다.

관리나 사신이 제주도로 가는 일은 일종의 도회로 취급될 만큼 큰 행사였던 것이다. 제주도로 왕래하는 공인이나 사인들의 규모와 횟수가 많아진 이유도 있었다.

1841년(헌종 7) 제주목사이던 이원조가 남긴 탐라지초본 제주구례조(‘耽羅誌草本’ 濟州舊例條)의 도회관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강진은 신구영송의지지, 월령진상의 수운 및 공엽의 왕래를 담당하며, 상인이 제주도에 들어오는 경우에는 도회관의 공문이 있어야만 비로소 바다를 건너는 일이 허락된다’

1601년 제주도에 파견근무 간 김상헌이 남긴 남사록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으니까 강진이 제주도로 가는 도회지 역할을 한 것은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온 셈이다. 남포마을을 거쳐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금의 강진군청 옆에 있는 숙소(객관)에서 묵었다.

그들은 제주도로 가는 순풍을 기다려야 했다. 북풍이 불어야 닻을 올리면 제주도로 배가 움직였다. 그렇게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순풍이 불면 남포마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갔던 것이다. 도회를 맡은 곳은 공무로 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이동과정에서 필요한 생필품도 지원했다.

제주도로 가는 사람들은 큰 무리를 지어 움직이곤 했다. 작은 돛단배 타고 두세명이 가는 뱃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관리들이 제주도를 오갈 때 한두 명을 이끌고 다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사람들 거쳐간 곳

1577년 과거에 급제한 임제는 강진읍 남당포를 통해 제주도 목사를 하는 아버지 임진에게 인사를 가면서 6척의 배를 가지고 갔으며, 이보다 앞서 1488년 제주에서 근무하던 중 고향 나주에서 부친상을 당해 급히 해남으로 들어오다 풍랑을 만나 13일간 표류해 중국 절강성 해안에 도착했던 최부 일행은 자그마치 43명이나 됐다.

남포마을 서쪽에서 강진만으로 유입되는 강진천의 모습이다. 남포는 이 처럼 동쪽에서는 탐진강이, 서쪽에서는 강진천이 들어오는 지점에 있어서 각종 산물의 유통중심지였다.
남사록을 남긴 김상헌이 1600년 해남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갈 때는 좌선 한 척, 전라수사가 내준 호송선 네 척, 제주 새 판관 환후선 두 척, 전라병사가 제주원군을 보내는 병선 두 척이 동행했고 바다에서 먹을 양식은 영암, 해남, 강진 3개 지역에서 규정대로 백미 삼십 석을 준비해 보냈다. 김상헌의 일행은 총 38명에 달했다.

1679년(숙종 5년 기미) 9월 16일 제주 안핵 겸 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제주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러 가면서 제주도에 들어가던 이증(李增, 1628~1686)도 마찬가지였다. 이증은 10월 27일 한양을 떠나 11월 25일 강진에 도착해 강진의 금릉객사에 묵었는데 눈비가 자주 내려 열흘 가까이 제주 뱃길이 막혔다.
 
12월 6일 순풍이 불어 배가 남당포에서 출항했다. 군관 2명, 별파진 1명, 화공·서리 2명, 남자노비 1명, 강진공방 1명, 포수 1명, 문서직 1명, 격군 8명 등 53명을 태우고 들어갔다. 동행자들은 이증이 한양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격군을 비롯한 상당수가 강진에서 자체 공급된 사람들이었다.
 
배가 뜰 때 강진 고을 수령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거문고와 노래로 작별을 했다고 하니 그 광경이 무척 경축스러웠겠지만 이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11일 동안 강진지역 민관이 겪었을 폐는 엄청났을 것이다.

이밖에도 제주에서 공출마를 실어 나르던 공마선에도 격군을 포함해 30~40명이 탑승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비용은 도회지의 부담이었다.

도회지라 불리며 각종 행사 주관

조선왕조실록 정조 19년(1795년)에는 비변사가 강진등에서 도회접대를 위해 섬 백성들에게 잡비를 거두어 들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도회지로 지정된 곳은 적지 않은 재정적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도회지는 강진과 함께 해남이 나누어서 개최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8일자 기록에는 ‘제주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강진, 해남, 영암이 도회를 나누어 정해서 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특정지역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도회지를 번갈아가면서 개최하라는 조정의 명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음식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접대를 적극적으로 하는 원님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렸던 것이다.

1793년 호남위유사(지방에 천재ㆍ지변이 있을 때 어명으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되는 관리) 서영보는 관리들이 지정된 도회를 어기고 특정 장소로만 몰려 폐단이 많다고 상소를 올리고 있다. 그렇다고 남포를 통해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떠들썩 하고 화려한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쓸쓸한 유배객들도 남포를 통해 제주도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남포를 통해 제주도로 유배를 갔던 사람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우암 송시열 선생일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해남의 관두량이란 곳에서 제주도로 들어갔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강진에 도착한 것은 1689년 2월 23일 저녁 무렵이었다. 자그마치 83세의 노인이었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강진읍 남포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의 목적지는 제주였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숙종임금의 진노를 사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양을 떠나는 길이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도 남포서 제주행

그런데 다음날 큰 바람이 불었다. 배가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우암의 아우 송시걸이 현감의 말을 전했다. 선박을 구해 수리할 동안 물맛이 좋은 만덕사로 옮겨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이었다. 그래서 우암은 백련사로 향한다. 그곳에 며칠 머무르면서 바람이 자면 남포로 돌아와 제주행을 시작할 요량이었다.

우암은 백련사로 가면서 ‘이제까지 바다와 산이 쓸쓸하여 봄빛이 보이지 않더니 절 아래에 이르니 상록수가 우거지고 춘백이 만개하여 장춘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봄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대학자가 백련사에 머문다는 말은 삽시간에 퍼졌다.

강진과 인근 지방의 학자들이 우암을 알현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우암은 만덕사에서 29일까지 머무르면서 문생들과 ‘태극도설’ ‘중용’ ‘수장’ ‘대학의 격물’등 여러 가지 주제를 강론했다.

우암은 3월 1일 백련사를 나서 남포에서 제주행 배를 탄다. 우암 선생은 제주도까지 갔다가 얼마 후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고 올라가다가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고 만다. 강진의 사림은 그를 잊지 않았다.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후 120여년이 지난 1803년에 사우(社友)를 지어 봉향하기로 결의하였다.

원래 정읍의 고암서원에 봉안된 우암의 영정을 백련사에 옮겨 모시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진 읍내에 별도의 사우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송시열 선생 사후 120년 후이니 당시 선생으로부터 강론을 듣던 강진의 유림들도 모두 세상을 떴을 시기다.

그들의 후손들이 송시열 선생을 잊지 않고 사우를 지은 것이다.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남포의 역사성은 무엇보다도 강진과 제주의 지명의 연관성에서 빛난다.

탐라가는 포구도 남포였을 것

강진의 옛 이름이 탐진(耽津)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강진군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보면 강진은 신라 35대왕인 경덕왕(742~764)부터 탐진이란 지명을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년)에 강진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탐진이란 이름이 사용된 세월이 자그마치 510여 년이었다. 제주가 탐라로 불리웠던 이유는 각종 문헌 속에 수없이 소개돼 있다.

제주사람들이 육지에 올 때 탐진을 통해 건너왔는데 임금이 그들을 반기고 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탐라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 등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대거 신라의 성시였다. … 읍호를 탐라(耽羅)라 하니 이것은 올 때 처음 탐진에 배를 대었기 때문이다.’

동문선의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제주의 시조성인 고을나의 15세손인 고후(高厚)가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탐진(耽津)에 닿아서 드디어 신라에 이르렀다. 임금은 그들을 반가이 대접하고 고후에게 성주(星主)라는 작위를 주고, 또한 고청은 임금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오게 하고 그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왕자로 삼고, 고을의 칭호를 ‘탐라’라 하였다.’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와 제주의 공식적인 교류는 신라시대부터였고 그 관문은 탐진, 즉 강진이었으며 신라시대때에 제주사람이 처음으로 도착했다는 이곳 지금의 강진읍 남포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포가 도회지가 될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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