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에서 제100회 전국체전이 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경성에서 처음 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체전은 80년때 까지만 해도 전국민의 관심속에 치러졌지만 요즘에는 그저 그런 체육행사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진에서 전국대회 참석한 선수가 나오면 집안은 물론 동문, 친구들의 크나큰 자랑거리였다.  

‘강진향토지’와 ‘강진군정 50년사’등을 보면 강진 사람의 첫 전국체전 입상기록은 1949년 제 30회 대회에서 나온다. 작고한 김영배 중앙병원 원장이 정구 개인전에 전남대표로 출전해 우승을 했다. 강진사람으로서는 첫 금메달이었다. 김 원장은 일제강점기인 28회, 29회, 30회 전국체전에서도 전남대표로 출전했다.

이 시기에 강진의 육상도 부각됐다. 강진읍 목리에 사는 차규환 선수가 광주고등학교에 다닐때 37회, 38회 전국체전 800m 대표선수로 출전해 동메달을 땄다. 입상은 못했지만 강진읍 동성리 김진홍 선수는 1935~1938년까지 100m 전남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평동리에 사는 김현대 선수 역시 1938년 광주서중학교를 다니면서 100m 전남기록을 세웠다.

전국체전에서 가장 두각을 보였던 종목은 뭐니뭐니해도 역도였다. 1949년 30회 전국대회때 황호동 선수가 중1학년때 전국체전에 처음 출전해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우람한 체격으로 대성의 기질을 인정 받았다. 훗날(1979년) 황호동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역도의 전국체전 입상은 1962년 열린 제43회 전국체전에서 시작된다. 강진농고에 다니던 황호용(현 강진문화원장) 선수가 전남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딴데 이어 다음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차지했다.

46회 대회에는 강진읍 위인량 선수가 동메달을, 47회때는 노치권 선수가 3위를 했다. 노치권 선수는 다음해(48회) 2위를 했고, 49회째인 그 다음해에는 당당히 금메달을 따내 1년 차이를 두고 금은동을 모두 따는 기염을 토했다.

전국체전에서 강진 선수가 선전했던 종목중에 의외로 눈에 띠는 것은 권투다. 1969년 제 49회 전국체전에서부터 50회, 51회 동안 신전 수양마을 출신의 임천규 선수가 미들급으로 3년 연속 은메달을 땄다. 대단한 선전이었다.

또 강진읍 남포마을 출신 정복철(미들급) 선수가 53회~57회까지 연속 전남대표로 출전해 모두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73년에는 강진에 ‘강진복싱체육관’이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2년후 체육관 개관 2주년 기념으로 ‘전국 최우수 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강진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대회였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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