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강진 대구에 고려청자를 있게 했나

공예태후 친정마을인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은 천관산 북쪽에 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다. 초기 고려청자가 생산된 칠량 삼흥리와 지척이고 중기 후기를 거치면서 최고급 청자를 생산했던 대구 용운리와 사당리와도 산맥이 이어져 있다. 옥당마을에서 태어난 공예태후가 탐진최씨의 시조인 최사전의 지원을 받아 고려왕실에 진출하는데, 이때부터 고려청자 전성기로 접어든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런 질문을 했다. 고려시대때 왜 청자가 강진에서 만들어 졌을까. 청자의 주 소비처였던 수도 개경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강진에는 좋은 흙이 있었고, 땔감이 풍부했으며, 개경으로 향하는 뱃길이 있었다는 그 이유는 무언가 2% 부족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2%를 찾아가는게 이번 인문기행의 주제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800여년전 고려청자가 강진에서 꽃피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첨단교통이 발달했다는 오늘날에도 강진은 우리나라에서 교통이 가장 좋지 않아 접근성이 크게 떨어지는 곳으로 꼽힌다. 이런 강진에서 800여년 전 어떻게 첨단 청자가 만들어지고 수도 개경까지 수급됐을까.

그 답으로는 자연 환경과 지리적 조건이 지금까지 가장 많이 거론돼 왔고, 여기에 2% 부족한 의미를 더하자면 정치·사회적 여건 등이 꼽힌다. 강진에서 청자가 생산된 이유는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유리한 지리적 요건과 생산에 필요한 자연환경, 그리고 제작기술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반, 이를 뒷받침해 준 세력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들이 합치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들에 대해 그 가능성을 살펴보자.

세계적 청자성지 강진

장흥군 관산읍을 지날 때 마다 묘한 신비함을 느낀다. 관산쪽에서 칠량쪽으로 넘어 오려면 천관산을 남쪽으로 보며 오게 된다. 햇볕은 천관산 남쪽에서 북쪽 관산으로 비춘다. 역광이다. 맑은날에도 역광 때문에 어렴풋한 해무가 끼어있다. 천관산 첩첩에 마치 신비한 영험이 감싸고 있는 분위기다.

옥당리 당동 마을 뒤쪽으로 큰 천관산이 있다. 앞쪽(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마을의 북쪽이다)으로 작은 야산이 있다. 이 작은 야산과 뒤쪽의 거대한 천관산이 만들어 내는 3D 이미지가 압권이다. 당동마을은 1126년 고려 제17대 인종의 왕비가 됐던 공예태후 임씨가 태어난 곳이다.

‘왕비의 고향’마을은 그렇게 신비화 된다. 공예태후는 이곳에서 임원후(任元厚)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손이 귀한 인종과의 사이에 의종, 경종, 명종, 충희, 신종 등 다섯형제를 낳았는데 그중 의종과 명종, 신종이 왕이 됐다. 아들이 셋이나 왕이 된 왕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기 어렵다.

1965년 대구면 당전마을의 모습이다. 12세기 최고의 상감청자가 생산됐던 곳이다. 이때는 인근 장흥 관산의 옥당리 당동마을 출신 공예태후가 개경으로 시집가 왕비가 되어 아들 셋이 왕위에 오를 때 이다.<청자박물관 제공>
관심을 끄는 것은 공예태후가 개경의 왕실로 시집가고, 그의 아들 셋이 잇따라 왕위에 오를 시기에 강진 청자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고려는 하극상이 난무하는 무신들의 대혼란시기였지만 상감청자가 나왔고, 고려와 강진, 장흥간의 교류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공예태후가 왕비가 되는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탐진최씨의 시조인 최사전(1067~1139)이란 사람을 알아야 한다. 최사전은 고려시대 인종의 어의(御醫)였다. 인종이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외조부였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다. 유명한 ‘이자겸의 난’이다. 당시 이자겸의 난을 결정적으로 제압하도록 도운 사람이 최사전이었다.

인종 임금은 이자겸을 영광군으로 귀양 보내고 최사전에게는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문화사랑 평장사라는 최고의 벼슬을 주었다. 1126년(인종4)에 이자겸이 물러나자 이자겸의 딸이자 인종의 왕비들은 모두 폐비 되었다.

장흥 관산출신 공예태후의 역할

그 후를 이은 사람이 당시 장흥 관산읍 출신의 임씨였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인종이 관산출신의 왕비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인종은 왕비를 위하며 ‘수시로 은전을 베풀고’ 장흥에 사는 왕비의 친정어머니가 죽자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영암에 소속되었던 장흥이 장흥이란 이름을 얻고 지사부로 승격된 것도 바로 인종때 였다.

공예태후의 존재는 강진에서의 청자생산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지원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산업의 발달은 그 시대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세력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청자를 만든 사람들은 이름 없는 장인들이었지만 장인들로 하여금 청자를 만들도록 한 사람은 어떠한 정치세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탐진최씨 시조 최사전도 눈길

1170년, 최씨 정권의 출현과 함께 전라도 세력의 중앙 정치무대의 진출이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는데 이는 최씨 정권의 주요한 물적 기반이 해안지방에 있었다는 것과 연관이 되는 것으로 그러한 측면에서 강진의 청자도 그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최씨정권 출범 직후 의종이 폐위되었지만 다시 아들 명종이 무신들에 의해 왕위에 오름으로서 중앙정치무대에서 공예태후의 존재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최씨 정권기에 강진의 정치적 비중 증대는 강진 땅에 감무(현감이 파견되지 못하는 곳에 과도적으로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가 파견되는 점으로도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기가 1172년으로 무신정권이 들어선지 2년째 되는 해였다. 강진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특별한 변화가 없었는데 왜 무신정권은 집권 직후 강진에 감무를 파견하였을까? 무신정권의 이러한 정책들이 강진청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큰 영향은 주었을 것이다.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은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을 잇는 뱃길이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강진은 중국 절강성쪽에서 청자제작 기술이 유입돼 발전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 청자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무위사와 월남사를 중심으로 하는 강진지방의 불교 세력이 승주의 송광사 불교세력과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되며, 무신 정권기에 문명을 날린 이규보(1168~1241)와 최자(1188~1260)가 지은 월남사진각국사비(보물 313호)에는 진각국사의 제자로 최이, 최항 등 최씨정권의 핵심인물들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무신집권기 이후로 청자의 질적 저하가 진행되었고 무신정권의 몰락과 강진청자의 쇠퇴를 시기적으로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정 세력과 강진청자 발달의 밀접성을 더해주고 있다. 공예태후는 1183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강진청자는 공예태후가 왕비가 됐던 12세기에 최전성기를 보냈다.

남쪽 땅 강진에서 최고의 청자를 만들어 고려 수도 개경에 공급하기까지 공예태후의 역할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청자축제때에는 청자촌에 들렀다가 칠량으로 해서 초당림을 구경하고, 산너머 장흥 관산면에 있는 공예태후의 생가를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들 셋 왕등극 강진청자 전성기

다음은 고려청자가 강진에서 만들어졌던 이유로 자연적 환경에 대해 살펴보자. 강진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가 청자제작과 관련하여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강조되어 왔다. 좋은 태토와 화목조달의 편리함. 청자 제작에 있어 알맞은 기후 등 청자발달의 조건상으로 강진 대구면 일대가 적격이라는 것이다. 칠량 삼흥리 일대와 대구 천태산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도 일제가 목재를 베어 유출했던 대표적인 곳이다.

둘째 지리적 요인이 크다. 강진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청해진이 장보고에 의해 강진 관내 완도 땅에 설치되어 해상무역을 선도했다. 그래서 중국 청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절강성 영파 지역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강진에 유입되어 고려 청자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진의 청자 도요지가 칠량면과 대구면 등 바닷가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지리적 요인이 강진청자 발달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이 지역의 바닷길과 관련성을 말하는 것이다. 전라도의 서남단을 경유하는 고대해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중요한 문화의 이동로이기도 했고, 그 경로상에 이곳 강진의 강진만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 말 청해진의 장보고로 대표되는 전라도 해상세력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3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용한 바닷길은 한반도 서남부의 전라도 해안을 경유하게 되었고, 역사상 이 바닷길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거의 말엽까지 인구와 물자 그리고 문화의 전파로였던 것이다. 마치 이 바닷길은 오늘날의 고속도로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면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일수록 이 바닷길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컸다.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그 근거지를 완도의 청해진에 잡았던 것이나, 영산강으로 연결된 이 해로가 신라 말 고려 초 선종 승려들이 중국에 불법을 구하려 왕래하던 길목이었던 점, 후삼국의 쟁패를 다투던 왕건과 견훤이 이 바닷길을 장악하려고 마지막까지 애썼던 흔적들은 이 같은 중요성을 증명하는 예로 들 수 있다.

강진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중국과의 잦은 문물교류가 바로 이곳을 경유하는 바닷길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특히 중국의 강남지역과 직결되는 이 항로는 중국청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절강성과 영파의 월주요계통 청자를 수용하고 전파 받는데도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최씨 무신정권도 강진과 연계

셋째 기술 축적이 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은 청자가 생산되기 훨씬 이전부터 토기 제작의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사실은 옹관을 만들던 배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는 토기제작 기술이 이미 축적되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양식과 기술인 청자제작 기법이 수용되고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한시대 후기의 토기 이래로 삼국 및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중 일부 적색토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환원번조로 일관되어 왔으므로 쉽게 회유토기에서 초기청자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같은 기술상의 축적과 자연적인 조건이 엇물리면서 청자의 급속한 발전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구도요지의 초기청자를 생산했던 용운리 일대에 토기가마 10개소가 확인되고 있으며 계율리에도 1개소가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구지역이 청자를 생산하기 전에 이미 토기를 생산했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청자의 전통이 조선시대에 와서 칠량의 옹기로 이어져 내려왔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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