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터 지키는 이성우씨, 강진의 188개 가마터 40년째 돌봐

1978년 첫 근무...작년 정년퇴직했다 올해 다시 계약직 채용돼

이성우 씨가 사당리 8호 가마터에서 잠시 사진촬영에 응했다. 이 씨의 뒤로 겹겹이 쌓인 ‘갑발’이 보인다. 도자기를 구울 때 담는 큰 그릇이다. 갑발은 가마 안의 이물(異物)이 끼는 것을 막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준다. 고려 초기 청자요(靑磁窯)에서부터 사용되어 조선 말까지 사용되었다.
“태풍이 오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둘러봐야죠”
지난 2일 오후 대구면 사당리의 한 고려청자 가마터.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어둠이 깔리면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기세였다.

작은 체구의 이성우(63‧사진)씨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전 고려청자 가마터를 한 곳이라도 더 둘러 볼 마음에서였다. 가마터가 굵은 장대비나 태풍으로 인해 훼손될 우려는 없는지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굴의 흔적은 없는지, 묫자리로 침범되지는 않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왔던 일이다. 인생의 2/3을 그렇게 살았고 그 삶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청자가마터 감시원’. 40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이 씨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청자박물관에 근무하는 이 씨가 하는 일은 청자촌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는 가마터를 관리하는 것이다. 가마터는 대구면 수동리에 6기, 사당리에 43기, 용운리 75기, 계율리 59기 그리고 칠량면 삼흥리에 5기가 자리하고 있다. 모두 합해 188기다. 이 씨가 지난 40년 동안 관리해왔고 또 앞으로 관리해야하는 가마터의 개수다.

요즘 같은 시기면 하루 종일 다녀봐야 둘러볼 수 있는 가마터는 고작 10기 정도다고 한다. 차량통행이 힘든 야산은 도보로 다녀야하는데 수풀이 우거진 곳이 많다보니 그만큼 점검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잦은 비와 태풍에 차량을 운행하기도 쉽지 많은 않은 일이다. 

업무환경으로 치면 12월~3월이 가장 좋은 시기다. 수풀의 영향이 적어 그만큼 가마터의 접근이 쉽고 상태를 점검하고 관찰하는데도 용이하다. 강진은 눈이 오는 날도 적다.

이 씨는 “겨울철은 업무 환경이 여름보다 낫지만 대신 많은 곳을 둘러봐야 하고 전수조사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숨 돌릴 틈이 없이 바쁘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 시기에 하루 평균 30~40곳 넘는 가마터를 점검한다고 덧붙였다.

지금에야 차량을 타고 다닐 수 있다지만 청자가마터 감시원으로 첫 근무를 하던 1978년도 시절에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곳곳에 분포된 가마터를 찾아 다녔다. 더위와 추위는 물론 거센 비바람과 거친 눈보라와도 싸움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곳곳에 분포된 가마터를 찾는 것도 쉽지 많은 않은 일이었다. 위치를 제대로 가르쳐 주는 직장 선배나 동료도 없었다. 위치가 기록된 책 한권이 전부였다. 책을 보고 직접 찾아가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책의 기록과 위치가 정확히 일치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수십 번. 가마터 188개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고 머릿속에 담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이 씨가 작년 6월 기능직 7급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올해 계약직 신분으로 청자가마터 감시원의 역할을 또다시 수행하고 있는 것도 어쩜 당연한 이유로 풀이되고 있다. 이 씨 말고는 가마터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업무의 기동성과 효율성을 함께 갖춘 인물이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이 씨는 이에 대해 “그만큼 큰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마터의 상태를 감시하고 점검하는 일이라지만 부상의 위험성도 크다. 멧돼지와 같은 야생동물의 습격에 대비해야하고 독사와 같은 독충의 공격도 늘 조심해야 한다. 때문에 수풀이 우거진 곳이나 깊은 산속을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는 동료와 함께 이동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이 씨는 지난 4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건 여전하다고 말했다. 문화재 보호와 재산권 충돌 사이에서 겪는 업무적 현실 때문이다. 대게 주민들이 묫자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그 충돌은 극대화된다고 한다.

이 씨는 “문화재 주변에서는 자기 땅에서 작은 공사를 하려고 해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반경 이내에 유적이라도 나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기 땅이라고 해서 묫자리를 함부로 쓸 수도 없다. 법이 그렇다”면서 “문화재 지정이 주민들에게 영광보다 고통이 되기도 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들에게 문화재법을 ‘악법’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일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 씨는 “주민들에게 감수해야 하는 불편과 손해에 대한 적절한 지원과 보상이 있어야겠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문화재 주변 개발 행위 규제를 명시한 문화재보호법이 누군가에겐 ‘악법’으로 꼽히는 이유다”며 “국가적으로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재산권 행위를 제한하는 운영의 개선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지금도 주변에서 부고 소식이 들리면 상주에게 찾아가 묫자리 조성 여부를 묻고 상황에 따라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이 씨는 “가마터 지킴이를 하면서 지난 세월 동안 욕설은 기본이었고 따귀를 맞을 뻔한적도 수차례였다”며 “그나마 요즘엔 문화재법을 이해해주는 주민들이 많이 늘어 고마운 심정이다”고 말했다.

대구면 사적 68호 가마터는?
대구면 일대의 청자 요지는 고려청자 연구에 가장 중심이 되는 도요지라 할 수 있다.
출토되는 기형은 주로 대접·발(鉢)·접시·병·매병(梅甁)·잔·합(盒)·호(壺)·기와·향로 등으로 다양하다. 순청자·상감청자가 대부분이지만 철회(鐵繪)·진사(辰砂)·철채(鐵彩)·철유(鐵釉)·흑유(黑釉)·백자(白磁)·퇴화청자(堆花靑磁) 등 거의 모든 기법의 도자기 조각이 출토된다. 현재 국가사적 68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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