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보급 고려청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 소장돼 있지만 6.25전까지는 핵심 보유기관이 개성박물관이었다. 고급 청자들이 일제강점기 대부분 개성에서 도굴된 것이었기 때문에 개성박물관이 일본인이나 개성상인들로부터 청자를 일부나마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6.25 직전인 1949년 5월 서울국립박물관으로 피난 내려왔다.

당시 개성박물관이 가장 자랑스럽게 소장하던 유물이 한점 있었다. 그것은 깨진 청자기와 조각 한점 이었다. 개성박물관 초대관장이었던 고유섭(1905~1944) 선생은  “청자기와 조각은 아주 희귀한 물건이라 우리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지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이충렬 지음 참고>

고유섭 관장의 말은 계속된다. “청자기와를 하나하나 만들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죠. 중국에서는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진 것만 보존돼 있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또 어디서 이것이 생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

1930년대 이야기인데, 당시 일제에 의해 강진에서 청자가 생산됐다는 것은 대충 파악이 되고 있었지만 청자기와가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 그 지역을 정확히 특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수께끼는 60년대 들어서야 풀렸다. 국립중앙박물관 과장이 된 고유섭의 제자 최순우가 1964년 초 청자 기와를 찾아 무작정 강진으로 내려왔다.

1964년 5월 늦은 어느 봄날이었다. 최순우가 대구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는데 한아주머니가 청자파편이 가득담긴 헌 소쿠리(대나무나 싸리로 엮어 테가 있게 만든 그릇)를 들고왔다. 소쿠리속을 들여다 본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토록 찾고 찾았던 청자기와 파편을 촌부의 헌소쿠리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당시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촌부는 이용희 전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의 모친 김월엽씨였다. 이때부터 사당리 일대 발굴이 본격화 돼 강진이 청자의 성지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고유섭의 말중에 ‘청자기와 하나를 만드려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800여년전 강진사람들은 중국에도 없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첨단 IT기술이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곳에서 올해도 청자축제가 열린다. 이번 청자축제때에는 우리 마음속 소쿠리에 상감청자를 수북히 담고 조상들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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