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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 12. 강진의 레이 찰스(Ray Charles) 김화윤반짝이던 무대복 입고 신명난 연주… 그는 앞못보는 소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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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03  1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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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맹인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이용복씨(좌측), 우측은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한 헬렌켈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김화윤은 강진이 낳은 천재급 기타리스트(Guitarlist)였다. 그의 기타 연주와 음악에는 대중예술가로서 끼가 넘쳤던 것이다. 그의 음악성은 강진중학교 재학시절 보라스밴드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80-90년대에 강진의 극장식 밤무대에서 김화윤은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로 서서 감성에 젖어, 열정적으로 기타를 쳤다. 그는 남도탕(윤영기) 건물 지하에서 본인이 직접‘하얀집’을 운영했다. 이후에 터미널 부근에서 생계를 위해 ‘엠파이어’를 운영하면서 기타연주에 더욱 몰입했던 것이다.

김화윤은 보컬그룹의 밴드 마스터였다. 보컬그룹(Vocal groupe) 이란 여러 명이 함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부르는 그룹사운드를 말한다. 김화윤 보컬 그룹에는 솔로 기타와 베이스 기타 그리고 섹소폰과 드럼이 있었다.

김화윤은 솔로 기타리스트였다. 극장식 밤무대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조명을 받으면서 김화윤은 반짝이는 무대복을 입고 신명난 연주를 했다. 무수한 앙콜을 받았다. 관객들의 함성을 뒤로 하고 돌아올 때면 고독과 절망감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가 많았다. 그는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기 때문이다.

김화윤은 필자의 강진초등학교 5년 후배였다. 어렸을 적에 조선의 부자 동문안 김충식집의 아래에서 살았다. 1960년대 후반 김화윤이 조대부고를 졸업한 후에 필자와 함께 강진재건학교 운영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였다. 농촌경제가 어려워  초등학교 졸업생 중에 태반이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1961년 5. 16 군사쿠테타 이후 재건국민운동강진지부(지부장 김기홍)에서는 강진읍사무소 회의실에다 향토학원을 설립했다.

   
김화윤이 활동했던 강진읍 엠파이어
교사로는 양희남(영어교사), 박복수(공무원), 김형묵등이 참여했다. 그 전통을 이은 것이 재건학교였다. 재건학교는 강진읍교회가 탑동 사거리 위 북산 자락 딸각다리 교회에서 연방죽 옆으로 이사한 후, 구 읍교회의 교육관 자리를 빌렸다. 필자는 학교운영을 하면서 영어와 수학, 음악과목 수업을 맡았다. 김화윤은 국어와 사회과목을 맡았을 것이다.

학생들은 약 6, 70명 쯤 모였다. 김화윤은 매사에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 이후로 강진도립병원에 X-ray 기사로 일했다. 여기에서 X선에 눈이 감염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큰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했지만 효험이 없었다. 필자가 목회하던 시절 필자가 찾아가서 오직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기도해주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화윤은 센스가 있고 분위기를 아는 연주가였다. 초저녁에는 김화윤이 ’La Playa, 해변’을 기타로 연주했다. 이 노래는 번안(飜案)과정에서 ‘안개낀 밤의 데이트’라는 감미롭고도 애수에 찬 로맨틱한 제목이 되어버렸다.

요즈음은 스마트폰 유투브에 들어가서 노래 제목만 치면 바로 동영상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기타를 처음 배우는 초년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노래 중 하나가 19세기 말에 작곡된〖로망스〗이다. 이런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곡들을 선곡해서 들려주었다.

김화윤이 선호하는 곡(曲) 중에 ‘You are my sunshine’하나는 빙 크로스비((Being Crosby)가 1941년 발표한 곡이다. 이 곡은 많은 버전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히트한 버전이 1962년에 레이 찰스(Ray Charles)가 발표한 것이다.

박진표 감독이 2005년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과 전도연이 ‘너는 내 운명(Sun Togehter)’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강진에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슬픈 운명을 안고 살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선사했던 김화윤이라는 대중음악가가 있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소경가수 레이 찰스와 이용복

레이 찰스는 로빈슨이란 본명으로 조지아주(洲) 올버니에서 태어났다. 7살 때 녹내장(綠內障)에 걸려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플로리다주 세인트오거스틴의 특수학교(Florida School for the Deaf and Blind), 즉 벙어리와 소경을 위한 장애인 학교에서 음악, 피아노, 점자를 공부하였다.

그의 스타일은 찬송가, 재즈,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1940년대 후반에 자신의 재즈 그룹들과 함께 순회공연을 하기 시작하면서 솔(홀로, 단독)가수로서의 개인의 목소리와 음악가로서 발달시켰다. 그의 명곡으로는 “I Can’t Stop Loving You”(1962년에 녹음)가 있다.

레이 찰스는 1981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등록되었으며,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미국 케네디센터 평생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을 받은 데 이어 1998년 폴라음악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2004년 6월 10일 향년 74세로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2008년 미국의 잡지 롤링스톤이 발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명’(100 Greatest Singers of All Time)에서 1위인 아레사 프랭클린 다음에 해당하는 2위를 차지하였다.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로 ‘레이’가 있다. 앞이 완전히 안보이는 소경 레이 찰스가 이만큼 자신의 예술에 대한 성취도를 이루었다는데 대해 우리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승리였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맹인 가수는 이용복을 들수 있다. 이용복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출생했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소아녹내장을 앓던 그는 8세때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시력을 잃은 그에게 친구가 된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뛰어난 기타 연주실력과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졌다. 고2 때인 1970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가 되었다. 1971년 여러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가수로서도 주목을 받았고, 1972년과 1973년에 10대가수상을 수상하며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또한 양희은가 ‘아침이슬’로 데뷔할 당시 12줄 기타를 연주하여 기타리스트로서의 실력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현재는 충남 태안의 한 바닷가에서 팬션과 함께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은데, 장애를 갖고도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갑절이상의 노력이 요구된다.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스토리를 이어가는 경우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한 헬렌켈러(Helen Keller)
 
헬렌켈러(Helen Keller, 1880-1968)는 미국 앨라배마 출신이다. 심한 병을 앓은 후 19개월 되던 때 시각과 청각을 잃었다. 6세 되던 해에 그녀의 부모는 헬렌 켈러의 교육을 위해 앤 맨스필드 설리번에게 맡겨서 1887년 3월 2일부터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설리번의 지속적인 지도 속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1904년 래드클리프 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전 세계 장애인 복지 사업에 큰 공헌을 했다. 1964년에 대통령 훈장을 수상했다. <나의 삶>, <헬렌 켈러의 비망록> 등의 많은 책을 저술했다.

유명한 시각장애인 사회운동가인 헬렌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헬렌켈러는 “나에게 사흘만 눈이 떠질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렇게 소원을 빌었다.
첫째 날에는 재미있는 영화와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싶다. 밤이 오면 빛나는 별과 달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서 발아래 펼쳐진 세상의 모습을 보고 싶다.
셋째 날에는, 아침에 열심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밤에는 쇼윈도에 진렬되어 있는 수많은 물품들을 볼 거야.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사흘간 눈을 떠서 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겠다. 
소경 대중음악가 김화윤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강진사람들에게 즐거운 음악을 선물한 것이다.

김화윤의 삶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이웃과 가족과 더불어 열심히 살다가 간 훌륭한 대중음악가였다. 그의 삶에 대해 연민과 함께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 된 남편을 위해 수고하고 자녀로서 장애인 아버지에게 효도했던 자녀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또한 대중음악가 김화윤의 예술적 재능을 올바로 평가해 준 내 친구 한성수(철강업)와 서영창(조제약국)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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