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구와 영랑, 영랑과 현구

영랑(좌측)과 현구는 1930, 4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이 걸죽한 두명의 시인은 강진에 살면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 영랑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정도로 시대를 활보했지만 현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읍사무소 서기를 하며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시를 사랑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해에 태어나 6. 25란 역사의 비극속에서 엿세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영랑하면 5월을 떠올린다. 모란이 만개하는 화려한 5월. 그는 모란과 함께 언제나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9월에 영랑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9월은 그가 세상을 떠난 달이다. 그는 1950년 9월 28일 서울에서 포탄을 맞고 죽었다. 딱 이맘때의 일이다. 48세의 나이였다.

그로부터 6일 후인 1950년 10월 3일. 강진읍 지금의 강진고등학교 자리에서 또 한명의 시인이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이름은 김현구였다. 역시 48세의 나이에 강진의 서정시인 한명이 조용히 역사속으로 저물었다.

시대를 통틀어 어느 지역이든지 라이벌은 있었고, 언제나 쌍벽은 존재하지만 강진에서 현구와 영랑, 영랑과 현구만큼 쌍벽을 이뤘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쌍벽이나 라이벌로 규정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시대에 성장하며 시(詩)란 울타리 속에서 한 없이 자유로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장배경과 성품, 생활여건 등 모든 것이 달랐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두사람의 삶이었다.

아름답게 비교되는 두 사람

영랑은 관청(군청) 주변 탑골에서 태어나 살았다. 예부터 원님이 있던 관청주변은 부자와 아전들이 살았다. 군청 동쪽과 서쪽에 지금도 산재해 있는 기와집들을 보면 당시 시대상을 알수 있다. 영랑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정구를 즐기고, 판소리를 섭렵하며 시를 썼다. 호방한 성격에 정치에 도전하기도 했다. 

압구재는 군청쪽에서 서문정으로 넘어가는 작은 재의 이름이다. 이 재를 사이에 두고 현구와 영랑의 생가가 있다. 두 사람의 탄생배경과 성장과정, 성격은 너무나 달랐지만 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너무나 흡사했다.
현구는 압구재(귀신이 나온다 하여 아구재라 하였다고 함. 강진군 마을사 강진읍 편 참조) 너머에 살았다. 가난했고 수줍움을 많이 탔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했다. 읍사무소 서기가 그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압구재 너머는 지금이야 씨앤에스아파트, 건우아파트, 남양휴튼아파트가 줄을 섰지만 옛날에는 서민들의 동네였다.

압구재가 어디냐 하면, 요즘에 탑동빌라가 있는 언덕이다. 강진군청에서 서문정쪽으로 넘어가는 작은재다. 재라고 불리지만 해발 20m 정도 밖에 안되는 곳이다.

이 작은 재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영랑이, 왼쪽에는 현구가 살았다. 두 사람의 생가를 직선으로 그어 보면 불과 200여m다. 압구재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 놓았을까. 그들은 찬란할 정도로 시를 사랑하다가 강물이 몹시도 시퍼런 그런 슬픈 삶을 마감했다.

현구와 영랑의 일대기라든가, 그의 시 세계는 이 글의 큰 주제는 아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9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들이 사라진 순간을 되돌아 보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시를 찬양하는 것 만큼이나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영랑의 죽은 날로 돌아가 보자. 1950년 9월 초 어느날이었다. 서울시 신당동 402-4 주택에 풍체 좋은 사람이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왔다. 6.25 전쟁이 한창이여서 서울시내가 거의 초토화된 시기였다.

이 사람은 당시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던 김영랑 선생이었다. 이 집은 9촌뻘인 강진의 김현호씨 형제들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살던 집이었다. 6.25가 터진후 후퇴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몸을 피하던 김영랑 선생이 어렵게 친척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은 것이었다.

9월, 10월이 기억되어야 할 이유

김현호씨 형제들은 강진의 대표적 부호였던 비장네 집안의 손자들이었다. 김현호씨는 당시 서울공대 기계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고 그 아래 동생 김현영씨는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2학년이었다. 넷째가 현승이었는데 당시 12살로 서울 제동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다. 강진의 갑부였던 부친(비장의 막내아들)이 서울에 큰 집을 마련해 주고 그곳에서 형제들이 함께 지내도록 한 곳이었다.

영랑선생은 형제들의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넓은 1층 가운데 다다미방을 사용했다. 영랑은 이곳에서 보름정도 피신했다. 이때 영랑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이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현승(81세)씨다. 그는 영랑선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다. 단순히 6.25때 적의 파편을 맞고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만 알려진 영랑선생의 최후 모습이 현승씨의 증언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진다.

서울 신당동에서 죽음맞은 영랑

영랑선생이 신당동 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은지 보름 정도가 지난 9월 23일 경의 일이었다. 이미 그때는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 마지막 서울수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영랑선생은 그때까지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의 동쪽에 있던 부엌앞 처마아래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1950년 9월 23일 오후 시간이었다. 서울 신당동 주택에 갑자기 포탄 한발이 떨어졌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퍼졌다. 포탄이 떨어진 지점은 동쪽 부엌앞 담장이었다. 부엌과 담장은 불과 12~15m에 불과했다. 부엌앞 처마밑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영랑선생과 현승씨의 둘째 형이었던 현영씨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식간에 파편이 두 사람을 덮쳤다. 포탄이 떨어진 시간, 소년 현승군은 다른 사람들과 방공호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차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온몸에 피가 낭자한 영랑선생과 형님 현영씨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방공호 계단을 내려왔다. 영랑선생은 복부와 다리에 피가 낭자했고, 현영씨는 왼쪽팔이 거의 벌집이 되어 있었다.

병원을 가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에서 방공호에서 4일을 보냈다. 응급조치래야 집에 있던 ‘옥도징끼’를 뿌려주는게 고작이였다. 9월말 방공호는 고온다습했다. 파편이 박힌 상처가 썩기 시작했다. 영랑선생은 그곳에서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실신과 깨어남을 반복했다.

현승씨에게 특명이 내려졌다. 밖에 나가서 어떻게 해서든 마대포대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마대 두 개를 어렵게 주워서 집으로 왔다. 어른들은 그것으로 들것을 만들었다. 9월 27일 밤 12시쯤 됐을 것이다. 캄캄한 밤에 두 사람을 당가에 싣고 거리로 나갔다.

주요도로는 모두 통제되고 있을 때다. 현승씨도 영랑선생을 태운 당가의 한쪽을 잡았다. 일행은 두어시간을 헤맨 끝에 어렵게 ‘내과의원’ 간판을 발견했다.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간절한 외침끝에 어렵게 문이 열렸다. 내과병원에서 파편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사고가 난 후 거의 4일만이었다. 영랑선생의 상처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다. 복부아래 파편을 제거했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의 나이 48세때의 일이었다.

강진고 자리가 현구가 떠난 곳

최근 복원된 현구 김현구 선생의 생가다. 압구제 서쪽에 있다. 이곳에서 현구문학제가 열린다. 현구선생은 생가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서문회관 자리에서 좌익들에 의해 끌려가 지금의 강진고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로부터 6일 후, 1950년 10월 3일 현구선생이 세상을 떠나던 곳으로 가보자. 9월 28일 수도권을 빼앗기고 남쪽에 남게 된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됐다. 강진에 있던 인민군들은 10월 1일 부랴부랴 퇴각했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공황상태에 빠진 것은 지난 한달동안 인민군에 협력했던 좌익들이었다. 이들은 도망갈 시간을 저울질하며 쉴새없이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모두 함께 후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진읍 서성리에서는 지금의 서문회관 바로 뒷편에 마을회관이 있었다.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을 그곳으로 모이게 했다. 일반 주민들은 인민군이 떠났는지, 경찰이 오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모이지 않으면 어떤 해꼬지를 당하지 않을까 해서 무조건 공터에 나가는게 일이였다.

10월 3일 오후에도 그랬다. 마을사람들에게 회관앞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사람들 틈에는 현구선생도 포함돼 있었다. 현구선생의 집은 회관과 불과 50여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모이라는 명령을 못들은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50여명의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칼빈총을 맨 김성옥이란 사람이 어딘가에서 나타났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김성옥 이란 사람은 인민위원회의 실세로 활동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위세를 당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는 수하로 부리고 있던 이성삼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

김성옥이 손가락으로 사람들 틈에 있던 현구선생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다시 한쪽에 있던 강진세무서 과장(당시 39세 추정)을 하던 김세원이라는 사람과 금릉중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던 쌍둥이 형제 한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성옥의 손가락 신호를 받은 이성삼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이성삼이 군중속을 헤치고 들어가 현구선생과 강진세무서과장, 금릉중학교 음악선생을 데리고 나왔다. 이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성삼은 세사람을 데리고 서문정 사장나무를 지나 낙하정을 돌아서 공동묘지가 있는 지금의 강진고등학교 자리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 함께 조명될때 모두 유리

공동묘지에는 전쟁이 한창이던때 만들어 놓은 반공호 비슷한 진지가 있었다. 묘지들을 방패삼아 뒤쪽에 구덩이를 파 놓은 형태였다. 이성삼은 데리고간 세명을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렸다. 그러더니 미리 준비했던 장작을 이용해 세사람의 뒷머리를 차례로 내려쳤다. 한명 한명이 맥없이 구덩이로 내려 떨어졌다.
 
현구선생이 목숨을 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서정시인 김현구는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다. 이성삼과 김성옥은 빨치산들과 함께 후퇴하다가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훗날 돌았다. 누구도 그들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10일 1일부터는 현구문학제가 열린다. 현구가 있었기 때문에 영랑이 빛났고, 영랑이 있었기 때문에 현구가 찬란했다. 압구재를 오가며 두 시인의 생가를 바라보면서 두 시인이 걸었던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달랐던 인생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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