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료데이(요정)’에는 가야지 유곽은 ‘쫄짜’들이나 드나드는…

유곽 ‘다마야(玉屋)’

일제강점기때 유곽이 있었던 옛 전남도립병원건물의 모습이다. 지금은 청소년문화의 집이 들어선 자리 주변이다. 이 유곽건물은 전남도립병원건물을 거쳐 80년대후반까지 강진군립도서관으로 활용됐다. 건물의 모습이 군산의 명산동 유곽모습과 비슷하다.<강진일보 자료사진>
일제강점기에 강진에 유곽(遊廓)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오사카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해방 후 귀국하여 평생을 강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살아온 박상우(92세) 선생은 강진에 유곽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유곽이란 성매매소(性賣買所)이다.

일제는 한국을 불법으로 침탈하여 자기네 식민지로 삼은 후, 일본인 거류민들이 있는 곳에다 유곽을 지어놓고 자국민 남성들의 성적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던 곳이 유곽이다. 말하자면 일제는 성매매 문화를 공적으로 합법화시켜준 것이다.

강진경찰서 앞에서 우체국쪽을 향해 내려가다보면 좌측으로 현재 강진청소년 문화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에 바로 ‘다마야(玉屋)’라고 부르는 유곽이 있었다.

필자가 1950년대 중후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바로 그곳은 강진도립병원이었다. 2층에 치과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2층까지도 여러번 올라갔던 적이 있다. 당시 치과담당선생은 필자의 선친 김봉두(金奉斗)의 친구인 김주홍(金柱洪)이었다.

전북 군산시 명산동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유곽의 모습이다, 1920년대 건물로 알려진다.<사진=오마이뉴스>
김주홍은 서울에서 외과원장으로 있는 김유성의 장형이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우를 의대에 보내어 강진농고 출신으로는 최초의 의사가 나오게 했던 인물이다. 또한 나의 초등학교 동창인 교사출신 김부준의 선친이다.

그 후 강진도립병원은 현재 농협 앞으로 이전해 갔고, 그곳은 1960년대 중반에 강진군립도서관이 되었다. 강진에 도서관이 세워지므로 독서보급은 물론 많은 입시, 공무원 수험생들의 수련장이요, 등용문(登龍門)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주로 고전 소설류의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강진에서 유일한 유곽인 ‘다마야(玉屋)’는 큰 길에서 약 30m 깊숙이 들어가서 L자 형태로 지어진 일본식 이층 목조건물이었다. 일본식 다다미 방이 약 20개 이상이나 된 큰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수십명의 유녀(遊女)들이 화사한 기모노를 입고 게다짝을 신고 딸가닥 거리면서 희희낙락거리고 다녔으리라 상상해 본다. 그래도 당시 창기들은 나름대로 절조가 있었다. 맨 얼굴을 내보이는 것도 수치로 알았다. 맨 얼굴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몫이라는 의미이리라.

영업을 시작하기 전, 기생들은 일본 당고 크림을 바르고 하얀 백분을 덕지덕지 발라 친척이 봐도 누군지 모를 정도로 짙은 화장을 했다.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편(阿片, opium, morphine)을 하는 여성들도 생겨났다. 

‘다마야(玉屋)’는 아담한 정원을 품고 있는 운치가 있는 건물이었다. 정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봄이 되면 자목련(紫木蓮)과 백목련(白木蓮) 그리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건물 건너 마당 한편에는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잎사귀가 무성하게 아우러진 오랜된 플라터너스가 수문장(守門將)처럼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이 건물은 상당히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 건물의 낭하(廊下, 복도)를 가로지르면 건너편 옛 읍사무소로 가는 길과 통하게 되어 있었다. 경찰서길과 읍사무소길을 잇는 샛길 역할을 해서 아이들이나 어른들도 무시로 이 건물의 복도를 가로질러서 길을 건너갔던 것이다.

이 건물을 막 지나면 골목에 도립병원 사택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병원 사택에는 초등학교 동창이요 간호부의 딸인 키 크고 예쁜 소녀 윤희가 살았다. 건너편 읍사무소 통 길가에는 원장사택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동창 조남재가 살았다.

조남재의 누나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양자의 이인수의 부인이 된 조혜자였다. 조혜자는 시어머니인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호주댁으로 불리우는)가 과부가 된 후 22년간을 모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이곳은 밤이 되면 상당히 으슥한 골목길이었다. 
 
일본에도 조선에도 유곽촌은 넘쳐났다
 
       
유곽이란 공창(公娼)들을 집창(集娼) 방식에 의해 일정구역 내에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던 장소를 유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본에 유곽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그는 1585년 오사카의 게이세이초(傾城町)를 유곽으로 공인했으며 다음해에는 교토(京都)에도 유곽을 허가했다.

이를 이어받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시대에는 25개의 유곽이 있었으며 특히 에도(江戶)의 요시와라에는 2,000명이 넘는 공창과 다수의 고용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교토의 시마바라(島原), 오사카의 심마치(新町) 등도 유명했는데 이들 유곽은 일본의 문학작품과 우키요에의 창작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한국의 첫 유곽은 1902년 부산 부평동에 조성된 미도리마치(해방후 완월동), 1903년 원산, 1904년 서울 남산으로 올라가는 초입 중구 묵정동에 있는 신마치, 용산에 있는 모모야마가 유곽촌을 이루었다.

특히 1904년 봄 재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은 남산 아래 쌍림동 땅을 한성부로부터 빼앗다시피하여 유곽사업에 착수했다. 이 유곽촌을 ‘새마을’이란 뜻의 신마치(신정·新町)로 바꾸었다. 이로서 한반도 최초의 공창지대가 생겼다. (2019년 9월 4일자, 한겨레자료)   

군산에도 유곽문화가 많았다. 한국 성매매 역사를 정리한 책 ‘유곽의 역사(홍설철 저)’에는 “1930년 명산동 유곽에는 일본인 업소 8곳이 있었으며 접대 여성은 모두 61명이었는데, 조선인 업소 3곳에는 26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어 강진의 유곽 운영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현지인의 인터뷰를 통해 “그때 명산동 유곽은 요정(料亭)처럼 게이샤들이 춤도 추고 술도 팔았어. 사람들은 유곽에 가는 것을 천하게 여겼지. 적어도 ‘료데이(요정)’에는 가야지, 유곽은 ‘쫄짜’들이나 드나드는 집이라고 해서 ‘조로야(卒伍屋)’라고 불렀다구”라고 말했다.

목포에는 사꾸라마찌(櫻町)가 유곽촌이 되었다. 해방 후 금화동으로 이름이 바뀐 곳으로 목포의 대표적인 유곽거리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삼교루, 조선인이 경영하는 명월루 등이 유명했다.

유곽이 성업하면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당시 비판적 지식인 잡지였던 ‘호남평론’에는 이를 지탄하고 세태를 신랄하게 꾸짖는 글들이 실렸다.

지금은 축대 일부와 일본식 가옥들이 외형이 변형된 채 일부 남아 있다(김재석 시인, 자료제공). 강진이 낳은 시인 김재석은 목포 마리아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후에도 강진을 가슴에 품고 20여권의 ‘강진시’를 써왔다. 결국 한국의 유곽은 1947년 10월 미군정청이 공포한 공창폐지령에 따라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땅에 성윤리 의식이 고양되야 한다 

이러한 제도는 공창이건 사창이건 여성이 돈에 팔려 성노리개가 된다는 점에서 여성인권유린 현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남성우월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악습이 바로 공창제도이다. 페미니즘(feminism)이란 말이 있다.
 
‘여성’이라는 뜻의 라틴어 femina에서 유래했다. 즉 모든 성별(젠더)은 평등하다는 이념인 것이다. 창기의 역사는 성경에서부터 나온다. 혹자는 인류의 직업 중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과부가 된 자부(子婦) 다말이 얼굴에 너울을 쓰고 유혹하는데 넘어갔다. 결국 약조물(花代)을 주고 성관계를 갖고서 자부를 임신시켰다.

이것은 다말이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후 이스라엘의 풍속(繼代法)에 따라서 후손을 생산할 기회를 박탈 당한데 대한 궁여지책으로서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베레스와 세라라고 불리우는 쌍둥이를 생산했다. 이는 불륜의 차원을 넘어서 다말이 남편 엘의 대(代)를 잇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륜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을 번성케 하려는 신앙행위로 보는 것이 성경적 관점이다.(창세기 38장)

이 성(性)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神)의 선물이요 인간의 종족보존의 도구임과 동시에 잘못 쓰면 인간을 동물이하로 격하시키는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명예욕, 권세욕과 같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이를 잘 절제하는 훈련을 받으므로 개인의 인격과 도덕성이 고양되고, 고결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성적 쾌락을 얻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절제력이다.

도덕적인 성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랑과 절제와 덕이 함께 추구되는 성교육이 자라나는 청소년 교육에도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출향인·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