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그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그립다

1970년대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역에 모여든 인파의 모습이다. 60. 70년대 어려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마음만은 늘 부모 형제들이 사는 고향에 있었다.<인터넷 캡쳐>
추석이 왔다. 고향을 찾아 사람들이 온다. 그들은 언제 고향을 떠났을까. 지난 8월말 현재 주민등록상 강진의 인구는 3만5천504명이다. 실제 거주인구는 이보다 적다. 전국의 농촌지역이 그러하듯 강진은 인구 수준은 극히 미미하다.

강진지역은 지난 1967년 인구가 12만7천17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다가 68~70년까지 3년 동안 9천353명의 인구가 감소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은 1만793명이 역시 줄어들었다. 두 기간 모두 3년 단위 인구 감소폭으로 가장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75년부터는 매년 1만명 이상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75년 한해 동안 1만6천903명이 전출했고, 76년에는 1만1천781명이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전출인구는 1980년에 1만3천629명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83년에는 1만3천30명에 달했다. 강진의 2006년 12월 말 현재 인구는 4만1천938명이다.

외지로, 도시로 떠난 사람들

1977년 지금의 강진버스터미널의 모습이다. 이 터미널을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고, 또 명절이면 고향을 찾아 돌아오곤 했다.<강진일보 자료사진>
이렇게 빠져나간 사람들은 대도시로 향했다. 이같은 현상은 전남지역 공통의 현상이었다. 전남도내 인구는 지난 1968년 413만8천명으로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해 70년에는 4백만5천명, 75년에는 389만명, 80년에는 377만명, 85년에는 374만명, 1990년에는 250만명으로 줄었다. 2007년에는 194만이더니 지난 8월말 전남도의 주민등록 인구는 186만7094명이다. 12년만에 100만명 이상이 줄어든 것이다.

60, 70년대는 전국의 어디 농촌 할 것 없이 대규모 이농현상이 있었다. 대표적인 목적지가 서울과 부산이었다. 당시 마을에는 초등학교만 나오면 서울이나 부산으로 공장생활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대도시로 떠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필자의 고향마을 친구 누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식모살이를 갔다. 아마 70년대 중반이 아니었나 싶다. 2년후 필자의 친구는 누나를 따라 서울의 목욕탕에 취직을 해서 떠났다. 얼마 후에는 친구의 동생이 형과 누나가 사는 서울로 올라갔다. 70년대 초반 필자의 누나들은 대부분 부산으로 갔었다. 큰 누나가 부산에서 신발공장을 다녔고, 둘째 누나는 큰 누나를 따라 역시 부산에서 공장생활을 했다. 강진군 강진읍 평동리에 살던 막내 삼촌도 부산으로 따라가 한때 직장생활을 했다.

이렇듯 가난한 농촌사회에서 이농과 이사는 연줄을 따라 줄줄이 이뤄졌다. 60, 70년대 이농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들이 있지만 원인은 결국 농촌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해보면 친인척 있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었고, 그것도 없는 사람들은 고향사람이라도 찾아가야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당시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1969년 목포~제주간 정기여객선으로 처음 투입된 삼화호는 당시 제주로 이주했던 강잔시람들이 많이 타고 들어갔던 배다.<강진일보 자료사진>
무작정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20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어릴 적에 이런 일을 목격한 적이 있다. 정약용선생이 유배를 살았던 다산초당으로 유명한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는 70년대 중반까지도 버스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만덕리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면 도암 석문마을까지 4㎞ 정도를 걸어와 강진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석문마을은 10여 가구가 살았던 필자의 고향마을이다.

슬픈 사연, 슬픈 이별을 했지

초등학교 시절 한번은 아침 일찍 심부름을 다녀오는데 도로변에서 중학생정도로 보이는 학생과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달래는 것으로 보였다. 제발 가지 마라고 설득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들을 잡아보려고 밤새 무슨 이야기를 했을 분위기였다.

두 사람 옆을 지나칠 때 그런 말이 들렸다.
“그래도 꼭 가야 하것냐”
“… … 예”
“… … 그럼 그래라”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것도 보지 않고 만덕리길로 발길을 돌렸다. 아들은 얼마 후 도착한 광원여객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원여객은 한껏 먼지를 날리며 길모퉁이로 사라졌다. 아마도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에 몇 일을 울었을 것이다.

60, 70년대 고향을 떠나며 이런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떠나는 사람도 그랬고, 보내는 사람도 그랬다. 지금처럼 물질이 풍부한 시대가 아니어서 미운정 고운정만 듬뿍 가지고 살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별은 모두에게 안쓰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뭄이 만들어 낸 이별

제주도로 떠난 사람들도 그랬다. 연로한 제주도 향우들에게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물으면 눈물이 글썽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들도 대부분 아름아름으로 들어왔거나, 제주도에 일자리가 있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이주한 사람들이다. 제주도 강진향우들 중에는 도암 출신들과 병영 출신들이 유달리 많다. 먼저 제주에 정착한 사람이 주변 사람을 한명 한명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한 마을에서 먼저 제주도에 들어간 사람이 이웃사람에게 일자리를 소개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주가 이뤄진 경우다.

60, 70년대 이주했던 전남 출신 향우들은 가뭄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이가 아주 많이 된 주민들은 60년대 중반에 큰 가뭄을 겪고 나서 들어왔고, 그보다 나이가 덜 된 사람들은 68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가뭄이 사람들을 섬으로 들어오게 했다고 했다. 또 77, 78년 가뭄 때 고향을 떠나 제주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60, 70년대 대규모 이농현상에 대해 여러 정치, 경제학적 분석이 있지만 주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징그러운’ 가뭄이다.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이농을 강요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지만 가뭄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작심하게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67년부터 78년까지 12년 동안 1967년, 1968년, 1976년, 1977년, 1978년 등 다섯 차례의 큰 한해를 입었다. 1967년 8, 9월 동안에는 호남지역에서, 1968년 6, 7월에는 호남과 영남에서 예년 강우량의 20~30% 정도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60년 만에 겪는 가뭄이었다.

가뭄이 만들어 낸 이별

68년 가뭄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전남지역은 전국에서도 한해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당시 전남일보에 보도된 상황을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다.

·1968년 5월 8일-전남 등 전국에 가뭄, 못자리 설치도 못하고 도시에서도 급수난
·6월 25일-영산강상류 고갈로 전남도내 각지 식수난(못자리 1천여 정과 기식답 4천여 정 고갈)
·7월 12일-호남지방 가뭄으로 곳곳에서 물싸움. 고흥군에서는 농민들이 면사무소 계장 살해. 호남비료 조업중단
·7월 25일-전남일보.‘가뭄으로 벼농사 전멸에 직면’ 보도. 호미모도 완전 실패, 300만섬 감소 예상. 광주시내 1만여 남고생들 들샘파기에 동원
·7월 29일-호남가뭄 극심. 대전과 이리에서 열차편으로 광주. 목포에 식수공수.
·8월 2일-나주 문평면에서 또 부녀자들 파묘사건 발생.
·8월 3일-경부고속도로 예산 60억원 깎아 한해보조.

심각한 한해가 계속되면서 8월초부터는 날품팔이라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2년째 벼농사를 불태워야 했던 농민들은 비를 기다리다 지쳐 이젠 같이 살아야할 땅을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고향을 떠나고만 있어 비가 오더라도 일손이 부족할 것 같다.

8월 1일부터는 제주도에서 물을 실어오는 초유의 공수작전도 벌어진다. 전남일보 8월 3자에는 목포~제주간을 오가는 여객선 가야호가 8월 1일부터 물을 하루 20리터(120드럼)씩 싣고와 목포시의 급수차량으로 고지대의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68년 양곡수매상황을 보면 당시에 얼마나 수확량이 감소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강진군의 경우 당초 추곡수매 일반매입 목표량이 3천464M/T이었으나 실적은 101M/T를 수매하는데 그쳤다. 목표량의 2.9% 수준에 그친 것이다. 강진이 이 정도였던 것을 감안할 때 간척답이 많은 해남과 영암, 산간 천수답이 많은 구례, 곡성 등지의 피해는 얼마정도였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정도다.

당시 농촌에는 ‘한해로 입은 얼은 3년간 계속된다’는 속담이 있었다. 해갈은 됐지만 당시 전남지역이 얼마나 피폐화됐는지를 보여주는 기사가 몇일 후 뒤따른다. 9월 4일자 전남일보 기사에는 전남지방의 한해 결석생이 전체학생의 30%를 넘고, 자퇴학생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전남도민 65%가 결핵에 감염된 것으로 집계됐다는 보도다. 9월 6일자에는 전남도교육위원회가 도내 초중등, 전문학교의 한해 피해 학생을 집계한 결과 피해학생 수가 51만3천여 명에 이르고 구호가 필요한 숫자가 44.4%라는 보도가 나왔다.

9월 15일자에는 강진군에서 장기결석 중학생이 619명이나 된다는 보도가 나왔고, 여학생 30여 명이 이미 가출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전남지역의 미아와 부랑아, 걸인들이 전년도에 비해 21배나 늘었다는 소식은 참담하기 까지 하다. 다른 농촌지역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처럼 전남지역은 ‘얼’이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

가뭄때 입은 얼은 3년 간다

78년 가뭄은 다행히 6월 22일부터 비가 내려 못자리 피해가 컸을 뿐 그해 가을 수확은 그렇게 감소하지 않았다. 강진은 강진읍 장동마을과 신전면 수양리, 옴천면 영산리, 칠량면 계치마을 등이 가뭄을 가장 심하게 타는 곳이었다. 이 일대는 80년대 초까지 저수지가 거의 없었다.

농촌에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농이 시작됐다. 매년 반복되는 한해는 농촌생활이 지겨울 정도로 농민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했다. 추석에 60. 70년대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의 역사를 되돌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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