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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 10. 추석을 맞아 중간 정리해 본 강진극장 역사그때 그곳, 강진사람들의 눈과 귀가 즐거웠다
김응곤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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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10  20: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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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극장이 운영했던 당시 모습이다. 강진극장은 1962년 문을 열었고 1990년대까지 운영됐다.
지난 1962년에 등장했던 강진극장은 90년대 초반 문을 닫기까지 강진 문화의 산실이었다. 근대들어 강진의 큰 역사가 강진극장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강진극장은 군민들의 꿈과 희망, 웃음과 눈물을 주었던 삶의 공간이자 인생의 한 터전이었다.

강진일보는 지난 7월부터 김병균 기고가의 ‘추억의 강진극장’을 매주 연제해왔다. 9월 현재까지 9편의 글이 실렸다. 지면을 통해 극장의 모습과 주변 풍경, 그리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재조명했다. 강진일보는 추석 명절을 맞아 앞서 보도된 ‘강진극장’이야기를 짧게 정리해 본다./편집자 주

   

1963년 1월 18일 강진극장 개장식의 모습이다.
 

강진극장은 사람들의 정신문화와 생활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극, 비극, 코미디, 창극, 애정영화, 서부활극, 외국영화 등이 공연되었다.

영화 상영은 물론 3.1절 기념식이나 8.15광복절 기념식 등이 극장에서 열렸고 선거철이 되면 유명 중앙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도 바로 강진극장이었다.

강진극장은 지난 1962년 7월 31일에 문을 열었다. 규모는 인근지역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 당시로는 우람한 2층 붉은벽돌 건물이었다. 정확한 좌석의 규모는 499석. 500석에서 한 석이 부족했다.

건축이전에는 가설극장이 서곤 했다. 달리 말해 임시극장이다. 당시에는 창고 같은 건물이나 공터면 가설극장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영화상영처는 단연 미국공보원이었다.

   

1959년 강진읍내의 모습이다.강진극장 대표사장이었던 서정완 선생이 운영했던 서약방과 금성여객 간판이 보인다.

현재 중앙지업사 자리다. 여기에서 6. 25전쟁 이후 반공영화, 늬우스, 계몽영화 예컨대 위생영화 등이 상영되었다. 물론 무료였다. 

강진극장 건립은 처음에 강진읍사무소가 주도해서 시작된 일이였다고 한다. 당시 강진경찰서 아래에 공회당이란 극장을 대신했던 공공건물이 있었다.
 
강진공회당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경성 부민관(府民館)과 같이 관공서가 주관하는 강연회나 공연장으로 이용했던 일종의 강진군민회관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자유당 시절, 경찰들에게 유도(柔道)훈련을 시키던 건물로서 상무관(尙武館)으로도 불렸다. 이 무렵 모든 영화상영이나 공식행사는 이곳 공회당에서 열렸다.

그러다가 점점 인구가 늘어나고 건물이 노후 되면서 1960년대 초에 강진의 유지들은 강진극장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계’라는 것을 만들어 극장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일종의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극장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시 서약방을 경영하던 서정완(徐正完), 강진소주 김유홍(金攸洪), 광명상회 명원채(明元埰), 모란다방 한고식(韓高植), 강진공업사 김영호(金英鎬), 천일의원 김성수였다. 대표사장은 서정완이었다.<이 글에서 존칭은 생략>

   

극장 개장 초기 공연을 왔던 구봉서, 배삼룡, 백금녀의 모습이다.
 

이들 모두는 강진에서 알아주는 부자들이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강진부자가 수백, 수천, 수만 석의 대토지를 소유한 땅 부자였다면, 해방 후 토지개혁이 된 다음 신흥부자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형 상인들이었다.

강진극장의 주주들은 모두 타계하였고 최근까지 백수(百壽)를 누리고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은 김유홍이었다. 당시만 해도 강진극장 터는 강진에서 제일 비싼 땅이었다.

그곳에 500석(席)의 객석을 갖춘 2층 극장을 짓는다는 것은 상당한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강진의 부자들은 의기투합하여 돈을 갹출했던 것이다.

   

 1960년대를 전후해 강진농고에서 활약했던 밴드부 학생들의 모습이다.
 

규모는 인근지역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 정확한 좌석의 규모는 499석. 500석에서 한 석이 부족한 게 흥미롭다. 아마도 건축법상의 어떤 규정 때문에 그렇지 않았는가 추정해 본다.

아무튼 그 정도의 규모는 여수의 시민극장(961석), 중앙극장(522석), 목포의 평화극장(667석), 호남극장(679석), 순천의 맘모스극장(749석), 시민극장(538석)에 이어 군단위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인근 해남의 중앙극장(435석), 장흥극장(386석)도 강진을 따라오지 못했고 영광극장이 498석으로 강진극장 다음을 기록한 정도였다.

1960년대 초 강진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마부’(馬夫)였다. 박서방(1960년)을 감독한 강대진(姜大振)감독의 역작이었다. 마부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 은곰(銀熊)상을 수상하므로 전국적으로 션세이션을 일으켰다. 강진극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초만원이었다.

동부로는 군동, 영포, 호동, 남부로는 목리, 남포, 물 건너 금사리, 서부로는 서기산 기슭 지전안통(장전, 부춘리, 자래부리, 송덕마을 등), 도원리, 학명에서까지 밤이면 ‘후레쉬’를 켜고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강진극장 포스터는 김승호가 마부로 분장하여 벙거지 모자를 쓰고 ‘말 구루마’를 몰고 가는 사진이 곳곳에 붙었다.

간판사는 천연색 뺑끼(페인트) 그림을 그려서 극장 이층 전면에다 대형간판을 걸게 그림으로 붙여놔서 흥미를 더욱 유발시켰다. 당시에는 강진중, 강진농고, 성요셉 여학생들도 단체관람을 하였다.

강진극장이 열리고 서울에서 많은 연예인들이 내려와 공연도 했다. 1970년대 초중반은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연예인이 온다고 하면 강진극장은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왕년의 스타 구봉서와 배삼룡, 백금녀 등도 강진극장의 무대에 섰다. 하춘화가 한참 이름을 떨치던 23세 무렵에도 강진극장 쇼 무대에 왔다. 아마 ‘하춘화 쇼’였을 것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쇼 공연이 영화와 함께 극장무대를 차지했다. 쇼 단체가 공연을 할 때에 흥행 수익을 위해 영화배우를 초청하기도 하였는데, 보통 한 명이나 두 명이 출연하였다.

하춘화는 코미디언 이주일 함께 동행했다. 가수 하춘화와 코미디언 이주일이 온다고 하니 강진극장은 한마디로 인산인해였다. 당시에는 극장도 만원이면 포개져서 보던 때였다.

여하간에 강진극장의 건립은 강진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바꿔놓은 일대 큰 사건이었다. 아직도 수많은 강진사람들은 강진극장을 기억한다. 강진극장은 80년대 초반이 되면서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는다.

강진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할 때다. 정확한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강진극장은 80년대 후반에 안방극장 TV에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정리=김응곤 기자>

■‘추억의 강진극장’ 필자 김병균 목사, 21일 광주서 출판기념회

본지에 추억의 강진극장을 연재하고 있는 김병균 목사가 오는 21일 오후 2시께 광주YMCA(2층) 무진관에서 출판기념회 및 강연회를 개최한다.

김 목사는 이날 기념회를 통해 저서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민중신학‧마르크시즘‧주주체사상간의 대화’를 소개한다.

김 목사는 “지난 40여년 간 농촌목회자로서, 변혁운동가로서, 신학연구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며 “남과 북의 종교적‧사상적 대화를 통해 한반도에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화해와 평화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강진 출신으로 장로회호남신학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 갈릴리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78년부터 2018년도까지 40년간 목회자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도 사회변혁운동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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